기획특집 해외관광 l 중국 다렌(大连)을 가다

해외관광 l 중국 다렌(大连)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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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시의 역사·문화·관광 자원을 답사하다.
– 뤼순감옥 방문, 처참한 역사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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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박물관, 연화산 전방대 관람

전병열 기자 ctnewsone@naver.com

뤼순 감옥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간 중국 다렌(大连)에서 개최하는 (사)한국잡지협회 세미나에 참가했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라 다렌의 역사와 문화, 관광 자원에 관심을 가졌다. 먼저 다렌에 관한 정보를 파악했다.

다렌은 중국 랴오닝성 랴오둥 반도 남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로 동쪽은 황해, 서쪽은 보하이해에 접해 있으며 인구는 2018년 말 기준 약 595만 명이다. 역사적으로는 랴오둥 반도의 중심지였다. 고구려, 발해 시기는 비사성이 있었던 곳이고,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는 청니와(青泥窪)라는 작은 어촌이었다. 이 지역은 고조선 왕조에 의해 최초로 지배됐으며. 이후 중국계 한족 왕조와 북방 선비족들이 지배하게 된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다시 되찾아 “비사성”이라고 불렀다. 1897년 러시아 제국이 삼국간섭을 통해 이 지역을 점령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대체하기 위해 황해에 접한 이곳에 항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했다. 러시아인들은 이 도시를 ‘달니이'(Дальний)라고 불렀고, 이후 인근의 다롄에 통합돼 구가 된 뤼순은 포르트 아르투르(Порт-Артур)]로 불렸다. 이 시기에 다롄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러시아가 유럽식으로 건설한 시가지는 지금도 남아 유명 관광원이 되고 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조차지(租借地)가 됐고 도시 이름도 다롄(大连)으로 바뀌었으며, 곧 일본령 관동주청의 중심지가 돼 하얼빈으로 연결되는 남만주철도가 건설됐다. 1951년 중국에 반환돼, 1981년 이전의 이름인 다롄으로 돌아갔다. 한때 보시라이가 다롄의 시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세워 입지를 강화했다.

특히 다롄은 우리나라 안중근 의사의 순국 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6월 호국보훈의 달에 그곳을 방문하는 의미가 남다르다.

인천공항 제1여객 터미널에서 합류하다
8시 30분까지 도착하기 위해서 서울 숙소에서 7시에 나섰다. 리무진 보다 서울역에서 공항열차를 타는 게 편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처음 이용해보는 것이라 서둘렀다. 특급이 있었지만, 대기 시간을 감안하면 비슷한 시간에 도착해 일반열차를 이용했다. 제1여객 터미널 3층에서 일행과 합류해 잡지협회에서 주는 선물이 화장품 종류라 검색에서 규제될까 봐 가방에 넣어 화물로 실었다. 그런데 카메라 건전지로 인해 검색에 걸렸으나 휴대하고 남방항공에 탑승할 수 있었다. 코로나 이후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라 다소 긴장이 됐다. 비행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이며 12시 45분경 다렌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과 시차는 1시간이 늦다. 입국 절차는 예전보다 까다롭다. 손가락 지문을 찍고 예전 출입국 기록을 조사한다. 외교부에서 보내온 문자에도 “2023년 7월1일부로 중국의 반간첩법이 강화, 시행돼 제도·게념 등이 우리나라와 달라 예상치 못한 피해가 생길 수 있으니 유의바란다“고 알려왔었다. 필자는 중국 국가여유국 초청으로 10여 차례 방문한 기록이 있어 지문 날인 없이 통과했다.

다렌 시내 대중식당 해리방(海里搒)에서 중국술(사진)을 한잔 곁들이며 식사를 한 후 대련 스위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2인 1실로 「골프먼스리」 조성수 대표와 룸 배정을 받았다. 호텔 맞은편에 노동공원(劳动公园)이 위치하고 있어 우리 방에서 창문으로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호텔 7층 연회장에서 발행인 세미나를 개최한 후 만찬이 진행됐다.

뤼순감옥에서 분노하다

감옥 건물

아침 일찍 우리는 비가 내리는 날씨 속에 뤼순지역으로 이동했다. 호텔에서 관광 버스로 약 1시간 20분 정도 달려서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 ‘뤼순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地) 박물관(옛 뤼순감옥)’에 도착했다.
뤼순 감옥(旅顺监狱)은 중국, 한국, 러시아인들을 수감했던 곳으로, 주로 항일 운동가들이 수감됐다. 애초 이곳은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됐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면서 중국, 한국, 러시아인들을 더 많이 수감하기 위해 1907년까지 증축을 계속했다.
수감자는 1906년부터 1936년까지 11개국의 항일운동가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이 수감됐으며, 독립운동가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박희광 등도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대지 22만㎡(6만 6천 평), 건평 1만1천㎡(3천3백 평) 규모다.
현재 뤼순 감옥은 중국 정부에 의해 항일운동의 주요 국가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외국인에게 개방됐으며, 안중근 의사 등 독립 운동가들의 전시관도 별도로 설치돼 있다. 국제항일열사전시관>으로 안중근 의사와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의 역사 사료들이 전시돼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유해를 찾지 못했다. 일본 당국은 안 의사 묘지를 만들면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될까 두려워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감옥 압구

감옥 박물관 건물은 공공건물처럼 평범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붉은 벽돌로 철옹성을 만들었다. 좁은 입구로 들어서자 당시의 감옥 내·외부와 철조망이 쳐진 외벽, 사형장 사진이 을씨년스럽게 전시돼 있다.

죄수복

낡은 죄수복이 걸려있는 벽면에 ‘감방’이라고 소개된 중국어와 영어 한글로 설명한 액자가 걸려있다.

감방

<감방>“감옥의 감방은 방사형으로 건축하였다. 동측 3층 감방은 모두 87개가 있다. 각 감방 면적은 11~15㎡이며, 평균 7~8명을 수감하였다. 감방 벽에는 중구어, 한국어, 일본어 등 3개국 문자의 감옥규칙이 붙어있다. 문 옆에는 죄수를 확인하는 번호표가 있다. 여름에 감옥 안에는 공기가 혼탁하고 매우 무더웠으며 겨율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아주 추워 여건이 열악하였다“
순화된 소개글이지만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느끼게 한다.

“끓는 피 가슴가득 솟아오르고 국권 회복 포부를 실현하지 못했네. 당을 위해 달게 이 몸을 바치고 인광은 매일 밤 중국을 비추네 -옥중시초- 라는 수감자의 한 맺힌 글도 보였다.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 감방>이라는 글과 함께 안 의사 사진이 든 액자도 걸려 있다. 쇠창살에 철조망이 쳐진 감방과 감방 내부를 살펴 볼 수 있다.

암방도 있다. 입구에는 “암방은 감옥규칙을 중대하게 위반한자와 반항, 투쟁을 하는 자를 수감하는방이다. 모두 4개가 있다. 가가의 방은 2.4㎡이며, 감방안은 캄캄하고 축축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벽에는 간수가 감옥 안을 감시할 수 있는 안은 크고 밖은 작은 원형의 감시창이 있다”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간수 초옥곤의 증언도 벽에 붙어 있다. 모든 설명문은 영어와 한국어, 중국어로 표기돼 있다.

<초옥곤의 증언>“복방공인의 파업을 주도했던 후립감이 감옥에 갇힌 후 간수는 그를 의자에 묶어놓고 고무관으로 입에 물을 부어 배가 불러오면 나무판으로 배를 눌러서 핏물이 입,코, 항문으로 나왔다. 그가 기절하면 간수가 찬물을 부어의식을 회복하면 그ㅢ 발 밑에 벽돌을 괴고 30분 후 밧줄을 풀어주면 걸을 수가 dqjt다.간수는 또 그의 손을 책상에 고정하여 손톱 밒을 강철로 만든 침으로 찔렀다.” 전율스런 증언이다. 

고문 형구와 고문실도 볼 수 있었다.

<고문실> 고문실은 조강(弔杠), 호랑이 이자 등 각종고문도구가 있으며 구속되었지만 아직 판결을 받지 않은 수감자와 ‘감옥규칙 위반자’dprp 잔혹한 형벌을 실행하였다. 당시 이곳이 주요 고문수단은 ‘태형(笞刑)이었다. 즉 납으로 감싼 대나무로 수행자의 피부가 찢어지고 살이 터지도록 때렸다.”감방 안에 걸려 있는 고문 도구들이 당시를 재연하는 것 같은 끔찍함에 소름이 돋았다.

<수학민의 증언>“1937년 6월 일본인은 공산당의 일을 도와주었다는 죄명으로 나를 잡아가서 여순 감옥에 가뒀다. 그들은 나를 호랑이 의자에 묶어 놓고 대나무로 죽을 만큼 때렸다. 하루건너 한번 때려서 ‘피딱지를 떼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나는 3개월 동안 한 달 반이나 이런 고문을 당했다. 지금도 몸에 매맞은 흉터가 남아 있다.“ 피 묻은 죄수복들이 벽에 걸려 있어 그 처참함이 실감나게 느껴졌다. 서부검신실은 감방에서 작업장으로 오갈 때 외나무 막대기를 걸으면서 알몸 검신을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작이 느리거나 똑바로 서지 못하면 매를 맞았다.

<감옥 제1공장>“입본 식민통치자들은 1907년 러시아가 원래 지었던 감옥을 토대로 15개 공장을 증축하고 여기서 전문적으로각종 군용품을 생산하였다. 이 공장은 원래 감옥의 제1공장인데 군용 장갑을 생산하였다. 지금 여기에 전시한 인쇄기, 식자대, 목공 공구, 삽, 벽돌, 집게 등은 그 당시 수감자들이 감옥에서 복역 당시 사용했던 각종 공구이다.

재봉틀, 할판 인쇄기 등 작업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공장 부역에 대한 타고지로의 진술>“나는 부하들에게 감옥에 수용된 중국 애국자와 주민들에게 부패한 쌀겨와 모래가 섞인 수수쌀밥을 먹이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들을 형무소 내에 있는 벽돌, 방직, 목공, 철공 등 15개 공장에서 매일 10시간 이상 강제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내가 임직했던 1년 동안 15개 공장의 총 이익이 53만 엔에 달했는데 쌀 159만 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본 은행을 거쳐 일본 대장성(재정부)에 보냈습니다.”

사형장 입구

『관동국요람』 기록을 벽면에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감옥 밖에서 부역하는 중궁인은 족쇄를 차야했고,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는 쇠사슬로 같이 묶어야 한다고 감옥규칙을 정했다.”

교행장(絞刑場)에 들어섰다. 사형수를 교수형을 집행하는 곳이다.

교살장 사진
교수대

<전 여순감옥 일본의사 고가 쇼이치가 기술한 교수형 집행 과정> “여순감옥의 중형범들은 다수가 만주와 몽골에서 잡혀왔다. 사형을 집행할 때 어떤 때는 3명, 많을 때는 5~6명이었다. 사형에 임할 때 형무소장, 의사 및 각 계장들 전체가 나란히 2층 계단에 서서 준비가 되면 사형수를 계단 밑에 끌고 내려가 먼저 중간에 선 형무소장이 판결을 선포한다. ‘관동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사형에 처하며 즉시 집행한다’. 간수는 사형수를 1㎡ 크기의 나무판에 끌고와 수감을 채우고 눈을 가린 후 형구를 씌워 연결고리로 목덜미를 단단히 묶는다. 경첩이 열리면 사형수가 이동식 나무판에서 떨어진다. 나는 계단 밑에서 대기하였다가 사형수의 심장 박동을 검사하고 즉시 형무소장에게 보고한다. 제1구 시체가 통에 담아 이동하면 다음 것을 기다린다. 비참하다 정말로 비참하다. 제1r, 제2구,.. 제5구까지 반드시 연속 검사해야 한다. 이런 사형수와 시체를 마주 보면서 내가 이런 직무를 담당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 통절하게 느꼈다. 참말로 견디기 어려웠다. 교수형에 씨이는 삼 노끈은 아주 낡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빨았는지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여순형무소 회고』에서

교살장의 비참한 광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교살형구가 그대로 남아 전시돼 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뤼순 감옥의 묘지 조성 모습 복원해 전시돼 있는 곳을 둘러보고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흉상을 모신 전시관을 경건하게 답사했다.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내용도 전시돼 있다.

“…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드림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히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 하옵니다….” 안 의사의 편지를 읽으면서 어머니와 후사를 염려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나서 1907년 조선의병운동에 참가해 참모중장으로 활동했고(大韓義軍參謀中將 安中根), 1909년 단지동맹에 참여하다가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고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 체포돼다. 안 의사는 일본으로 이첩된 후 11월 3일 이곳 뤼순감옥으로 압송됐으며, 다음 해 1910년 2월 14일 뤼순관동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뤼순감옥의 교수형장에서 순국했다. 이곳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시신들은 원통에 넣어 주변 야산에 매장했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항일운동을 했던 약 700여명의 중국인과 한국인들의 사형을 집행했다는 기록이다.

출구 벽면에는 안 의사의 친필 휘호 조자들이 걸려 있다. 순국 직전인 1910년 3월에 남긴 유묵(遺墨·생전에 쓴 글씨)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이 됐는데 그중 ‘인무원려필유근우'(人無遠慮必有近憂)란 휘호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말은 논어에서 유래한 문구로 ‘사람이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는 의미다. 참고로 문화재로 지정 된 유묵은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 ‘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 ‘지사인인살신성인'(志士仁人殺身成仁), ‘세심대'(洗心臺) 등 5점이다. 안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1910년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 40일간 뤼순 감옥에서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애국심에 더욱 숙연해졌다.

우리는 뤼순관동법원으로 향했다.

재판정

뤼순관동법원(旅顺关东法院)에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진행됐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대한 여섯 번의 공판이 이곳에서 진행됐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144일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2층 재판정에서 안중근 의사 DVD를 시청했다. 흑룡강성 하얼빈시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돼 뤼순감옥까지 오게 된 과정 그리고 사형 집행 직전 어머니가 만들어 준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모두 숙연해졌다. 뤼순관동법원은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등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역사적인 곳이다.

안중근 의사 친필 휘호
안중근 의사 추모 단상

박물관에는 어록과 친필 휘호, 고문 형구 등이 전시 돼 당시를 상항을 상상하면서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안 의사의 친필 족자가 벽면에 걸려 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ㆍ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휘호가 가슴에 와 닿았다.

안중근 의사 영정을 모신 추모관에 들러 묵념으로 안 의사의 명복을 빌었다. 뤼순관동법원 출구에 기념품점 있다. 이곳에서 판매된 수익금은 전액 관동법원구지에 기부돼 법원의 시설보전과 유지보수에 사용된다고 한다.

다렌현대박물관 관람
뤼순 감옥을 답산 한 후 다시 다렌시로 돌아와 다렌박물관을 관람했다. 다렌현대박물관은 대련의 근 현대사를 접할 수 있는 곳으로 입장료는 무료이며, 신분증 없이도 바로 입장하여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사진들과 근대 거리를 재현해놓은 다양한 전시 모형들이 있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도자기와 고문서, 서화, 시문, 화폐의 변천사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시내 춘화원(春華園)에서 식사를 했다. 다양한 중국 요리가 나왔으며, 특별히 미리 주문해서인지 독특한 향신료는 첨가되지 않아 입맛에 맞았다. 입구 안내판에는 해물 요리도 보였지만, 식단에는 없었다. 필자는 중국 각 성을 답사하며 다양한 요리를 경험한 터라 크게 흥미롭지 않은 평범한 식단으로 느껴졌다.

연화산(莲花山) 전망대에서 광안대교를 보다

연화산 전망대를 오르면서 마치 부산 광안대교를 보는 것 같은 광경에 놀랐다. 광안대교를 벤치마킹해 건립했다고 한다. 관광버스에서 내려 셔틀버스(일명 코끼리열차)를 타고 중간 지점까지 올라간 뒤, 걸어서 정상에 올랐다. 정산에 오르는 계단 난간에는 수많은 소원지가 촘촘히 걸려있는 모습은 우리나라 명산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연화산 정망대에서 필자

케이블카도 운행하고 있는데 왕복 60위안으로 편도는 판매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화산은 해발 260미터로 다렌시의 전체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전망대 위에서 성해만을 바라보니 짙푸른 바다위에 성해만대교(星海湾大桥)와 보석 같은 아름다운 섬들이 떠있다. 해안가로 들어선 도시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전망대 카페에서 냉커피 한 잔으로 더위를 식히고 상쾌한 공기로 심호흡했다.

삼겹살 만찬

저녁 만찬은 다양한 중국 음식을 기대 했는데 뜻밖에 한국식 삽겹살구이다. 간판도 ‘강호동 백정’으로 익살스럽게 한국어로 표기 했다. 삽겹살과 김치찌게 등 한국식 유사한 식단이다. 식사 후 전통시장 포장마차에서 바이주(白酒)와 맥주로 피로를 풀고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