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공무원이 되라 했고, 아빠는 교대에 가라 했지만 열여덟 소녀 이제야는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더 어려서는 사촌 승호, 동생 제니와 함께 집 옥상에 올라 밤하늘의 카시오페이아 성좌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제야는 가끔 울고 싶어하며, 때로 두근거리면서 어른의 시간을 기다리던 평범한 10대였다. 2008년 7월14일이 오기 전까지 그랬다. 열한 살 이후 처음으로 제야의 일기장에서 시간이 멎어버린 날이었다. 이날 제야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됐다.
최진영의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는 강간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고교 시절 친족에게 강간을 당한 주인공 제야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그에 맞서 제야가 어떻게 싸워서 이기거나 지는지를 피해 당사자에 밀착해서 그린다. 피해자이면서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죄인처럼 숨어 살거나 자책을 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삼는다.
일기장을 보여주듯 인물의 세밀한 내면을 독자와 공유하고 나아가 제야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확대함으로써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행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일상의 폭력을 대면하게 하는 이 작품을 집필하면서 여성인 자신조차도 내면에 축적된 가해자의 언어와 행동방식이 얼마나 농후했는지 새삼 발견하고 깊은 반성과 슬픔으로 제야의 마음을 상상했다는 저자는 소설 곳곳에서 뭉근하지만 단호한 진심을 깊이 있는 문장으로 전달한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