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고한읍의 ‘골목길 정원박람회’
1960-70년대 대표적인 탄광촌으로서 흥망성쇠를 겪었던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이 활기를 띠고 있다. 인근 함백산에서 열리던 야생화 축제가 작은 마을의 골목길과 어우러지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방식의 정원박람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제1회 고한 골목길 정원박람회’는 7월 28일부터 8월 11일까지 보름 동안 ‘함백산 야생화, 마을에서 만나다’를 주제로 열렸다. 고한 구공탄시장에서 마을호텔 18번가, 신촌마을까지 약 1.2km에 달하는 마을길이 주민들과 분야별 전문가들이 함께 가꾼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됐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녹아들어 있는 정겨운 골목길은 1만여 개의 야생화와 다양한 조형물로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다른 정원박람회에서는 없는 사람 냄새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고한 골목길 정원박람회’가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닌 ‘주민’ 기획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정원박람회가 열리는 고한읍 18번가에 위치한 ‘고한 호텔18번가 마을호텔 1호점’도 주민이 주도한 호텔이다. 이 호텔의 특징은 호텔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한 건물 안에 숙박시설, 식당, 카페, 세탁 등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호텔처럼 고한읍 18번가를 방문하면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접근이 시작이었다. 마을 호텔은 계속 변모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다. 관공서가 아니라 지역 주민이 직접 주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민주도형 관광
고한읍과 같이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관광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주민주도형 관광’이라고 한다. 이는 지역개발사업의 발의에서부터 세부 프로그램의 기획을 거쳐 시책의 집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주민이 주도권을 갖고 추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광 사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관광객에게 재화나 용역을 제공하는 각종 사업이므로, ‘주민 주도형 관광’은 주민이 고용과 소득 창출 등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 협력적으로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관광 사업을 경영하는 것을 이른다.
기존의 관광 정책은 정부 기관이나 지자체가 주도해왔다. 하지만 여행의 목적과 스타일이 다양해지면서 서비스를 전달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는 급변하는 관광 생태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행정적으로 지시를 하는 과정 속에서 자칫 지역의 특성과 주민의 수요가 도외시 되는 경향이 짙어 꾸준히 지속되기가 어려웠다. 대형 호텔, 리조트, 쇼핑센터 등 기업이 참여하는 관광 정책은 지역 주민 일자리 창출도 도모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달콤했으나 이로 인해 주민들의 삶은 급변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정선 고한읍이었다.
정선 고한읍은 탄광업으로 번성했던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탄광촌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광산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떠났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 조용한 마을에 남았다. 지역이 시끌벅적해진 것은 1998년 들어서였다. 지역 경제회생을 위해 관광산업을 육성할 목적으로 들어선 강원랜드는 ‘대한민국 유일 내국인 출입 가능 카지노’라는 비장의 카드로 관광객을 끌어 모았다. 폐광지역을 돕기 위한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으로 만들어졌지만, 부작용은 피할 수 없었다. 도박 중독은 물론, 강원랜드의 수익이 올라도 지역 경제와 상생하는 것은 별개였다.
강원랜드의 등장에 따라 고한읍에도 많은 마을 재생 사업들이 있었지만 관공서 주도의 큰 사업이 대부분이었다. 도로는 넓어졌고, 새 건물도 많이 들어섰지만, 주민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강원랜드만 향할 뿐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다. 강원랜드 특수를 노렸던 상가는 쇠퇴했고, 인구는 더 감소했다. 마을은 점점 으스스해졌다.
오랜 고민 끝에 주민들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을에 아무리 큰돈이 투장된다고 해도, 유명한 전문가가 나선다고 해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그 혜택은 주민들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집 앞 공터를 ‘작지만 예쁜 정원’으로 가꾸는 것에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잿빛 골목을 만들던 낡은 담벼락은 고운 빛의 옷을 입고 밝게 다시 태어났다. 빈집이 즐비하던 을씨년스러운 골목을 소박하고 따뜻한 골목으로 변모시킨 주민들은 이제 사람들이 가장 찾고 싶은 거리가 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고한읍은 시작 모델이다. 주민이 직접 주도하는 관광은 소박하고 소소한 규모에 그치지 않고 더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주민들이 만드는 마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항구 마을 ‘더쾨벌(De Ceuvel)’은 조선소가 버리고 간 오염된 땅을 마을 주민들이 부활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2000년대 초 경영난으로 조선사가 폐업한 뒤 10년간 폐허로 방치됐다. 80년 동안 조선소로 쓰였던 탓에 땅은 기름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정부가 지원한 보조금은 약 3억 원. 그 돈으로 300평이 넘는 공간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했다. 결국 주민들이 나섰다. 버려진 배를 업사이클링하는 자원봉사를 했고, 배를 땅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수백 명의 주민들이 함께 당겼다. 마을 골목으로 올라온 16척의 배는 사무실이 되어 스타트업 회사가 입주했고, 지금은 친환경 도시를 위한 새로운 실험을 진행하며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더쾨벌이 주민들의 삶에 밀착되어 있다면, 일본은 관광객 유치와 수익 창출에 초점이 맞춰져있다고 볼 수 있다.
아베 정권은 경제 성장의 동력이자 지방소멸의 대안으로 지역 관광 활성화에 집중했다. 차량렌트와 공유숙박, 비자 등 ‘대폭 완화’에 가까울 정도로 규제를 완화했다. 특히 지역주도형 관광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빼든 카드는 DMO(Destination Marketing Organization)였다.
일본의 지역관광경영조직은 관광지를 활성화하여 관광지역 전체를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조직을 의미한다. 기존 관광협회 체제로는 글로벌 관광 수요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데이터에 기반한 마케팅, 지역관광상품 개발에 나선다는 목적이었다.
연간 3천만 명이 찾는 스카이트리 타워가 있는 도쿄 스미다구의 스미다구관광협회는 1983년 창립돼 2009년까지 지자체 보조금 위주로 운영됐지만, 스카이트리 타워가 생긴 뒤 ‘재정적 자립’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DMO 등록을 진행했다. 회원사를 넘어 지역 전체를 위한 관광전략을 민간이 수립한다는 의지의 원동력은 주민들의 참여였다. 이들은 스미다구 관광이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아내고, 스미다구 주민들이 만든 물건을 관광 상품화 해 지역경제에 이바지하고자 매진하고 있다.
이는 ‘6차 산업’과 코드를 함께한다. ‘6차 산업’이란 1차 산업인 ‘농수산업’과 2차 산업인 ‘제조업’, 그리고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이 복합된 산업을 일컫는다. 농산물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농산물 생산(1차)만 하던 농가가 고부가가치 제품을 가공(2차)하고, 나아가 향토 자원을 활용한 농장 체험프로그램 등 서비스업(3차)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2002년부터 ‘녹색농촌체험마을’을 선정하여 농촌관광 활성화를 위해 각종 지원을 해왔지만, 6차 산업이라는 이름하에 만들어진 건물과 설비들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건물이나 도로와 같은 ‘하드웨어’가 아닌 주민이 중심이 되는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더쾨벌’이나 일본의 ‘DMO’같은 시스템은 주민이 주체가 되어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는 좋은 전도체라고 볼 수 있다. 교통사업자, 숙박·음식점 운영자, 농림어업종사자 등 지역의 다양한 관계자인 지역 주민들과 지자체가 연계할 수 있도록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대기업 공장이 들어서고, 대형 쇼핑센터가 건립된다고 해서 주민들의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만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켜켜이 쌓여 온 마을의 역사와 마을 주민들이 쌓아온 일상은 훌륭한 관광콘텐츠가 될 수 있다. 마을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자원을 활용하고 마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속 가능한 경제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은, 우리네 지역 관광이 가야할 미래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