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사비도성을 에워싼 부여 나성

[문화유산기행] 사비도성을 에워싼 부여 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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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역사유적지구 나성 표지석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시·부여군·익산시에 있는 8개의 백제 유적들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부여군에는 4개의 유적지가 선정되었는데, 부소산성·관북리유적,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 그리고 부여 나성이다. 이 중에서 부여 나성은 다른 유적들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백제의 도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에 해당한다.

고대의 도읍지는 여러 겹으로 성벽이 둘러 싸여 축조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안쪽의 성을 내성, 바깥쪽의 성곽을 외성이라고 한다. 당나라 때에는 규모가 큰 성을 나성(羅城), 그 안쪽의 작은 성을 자성(子城), 나성 바깥의 외곽성을 아성(牙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부여 나성(扶餘羅城)은 백제 시대 부소산성과 시가지를 내부에 두고 바깥을 두른 성벽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 고대의 도읍지 중에서 백제 사비기를 제외하고는 나성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고려와 조선에는 나성과 유사한 성격의 성곽이 존재하였다. 즉 부여 나성은 백제의 도읍 체계를 보여주며, 도읍지와 외부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조선시대 초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부여 나성의 존재가 확인된다. 반월성(半月城)이라는 이름으로 “돌로 쌓았다. 주위가 13,006척이니 이것이 곧 옛 백제의 도성이다. 부소산을 감싸 안고 두 머리가 백마강에 닿았는데,

그 형상이 반달 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지금의 아문이 그 안에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벽은 동나성의 성벽을 말한 것이며, 반월이라는 형태는 부여 시가지까지 합친 전체 형태가 마치 반달을 떠올린

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읍지, 사비도성

부여 나성의 범위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여 나성의 구간은 동쪽과 북쪽의 성벽으로, 편의상 이를 동나성과 북나성이라 부른다. 북나성 구간에는 청산성과 부소산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성벽을 잇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백마강(白馬江) 즉, 금강(錦江) 변에 성벽이 축조되었는지의 여부이다. 이를 나성의 서벽과 남벽, 즉 서나성과 남나성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존재는 아직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백제는 수도의 위치에 따라서 한성기·웅진기·사비기로 구분한다. 백제의 초기와 중기는 한성 즉 위례성에 도읍을 두었던 한성기에 해당한다. 개로왕 때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의 아들 문주가 웅진으로 피신하

여 다시 백제를 재건하게 되었다. 이때를 웅진기라고 부르는데, 당시 도읍은 철저한 계획 하에 천도한 것이 아닌, 갑작스러운 변란으로 인하여 피난한 곳이었다.

공주의 공산성은 강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성벽이 높고 험준한 요새에 해당한다. 때문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용이하다. 그렇지만 주변에 평야지대가 많지 않으며, 강물의 수위도 높지 않아서 바다의 배가 다니기에 쉽지 않다. 때문에 백제인들은 안정을 되찾으면서 다시금 천도할 계획을 가지게 되었다.

백제인들은 웅진 남쪽에 있던 사비 즉 부여를 주목하였다. 부여의 땅은 저습지대로 되어 있지만 농사짓기에 적절하였고, 바다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금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백제인들은 부여로 천도하게 되었다.

백제 동성왕 때부터 왕이 부여 지역에 자주 행차하는 기록들이 확인된다. 이후로도 사비 지역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으며, 성왕 때에 천도를 단행하게 되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옛날도 수도를 옮기는 것은 매우 큰일이었다. 옮겨간 수도에서

행정 사무를 일괄적으로 처리하며 전국을 통치해야 했다.

천도 이전에 모든 준비를 갖춰놓아야 국가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백제인들은 사비 천도를 확정짓기 전에, 이미 수도를 모두 완성시켜야 하였다. 수도의 기본이 되는 건물은 궁궐과 성곽이다. 때문에 천도에 앞서 부소산성과 이를 둘러싼 부여 나성이 제일 먼저 축조되었다.

백제의 도성으로 진입하는 동나성의 관문

부여읍의 지형은 동쪽과 북쪽이 높고, 서쪽과 남쪽이 낮은 형태로 되어 있다. 백마강이 흐르는 부여읍의 서남쪽은 주로 평탄

한 대지로 되어 있다. 부여읍은 낮은 산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평지에 해당하며, 동쪽과 북쪽의 산들이 성벽처럼 에워싸고 있다.

백제 사비도성으로 진입하는 나성의 주요 문은 동쪽에 자리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에도 논산 방향에서 부여읍으로 들어오려면 부여읍의 동쪽에 해당하는 능산리를 지나야 한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이 왕래하는 주요 길에 성벽과 성문을 세워두었다. 또한 이곳을 통해 사비도성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나성 동문 부근에 무덤과 사찰 즉 능산리고분군과 능산리사지를 조성하였다. 동문지의 위치는 왕릉로와 대백제로 사이의 공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능산리고분군과 능산리사지의 동쪽에는 청마산성(靑馬山城)이 있다. 아울러 동남쪽 금강 부근에는 석성산성(石城山城)이 위치한다. 이 두 성은 사비도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위치한 방어 시설이다. 이들 또한 부여 나성이 조성될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청마산성의 경우 동나성 성벽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여, 상호 연계하여 방어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동나성의 성벽은 현재 부여 나성 중에서 가장 잘 남아 있다.

능산리고분군과 능산리사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동나성의 성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돌로 쌓은 흔적이 잘 드러나지만 본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오랜 기간 동안 흙이 퇴적되어 석축 구간을 덮고 있었다. 근래에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성벽의 원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동나성의 성벽은 왕릉로와 대백제로라는 도로를 기준으로 맞은편에 이어진다. 동나성 남쪽 성벽은 이전에 발굴되었으며, 본래 사라졌던 유적 구간을 복원하여 대백제로 옆까지 연장하여 축조하였다. 성벽 발굴조사 결과 부엽공법이 사용되었음

을 확인하게 되었다. 부엽공법(敷葉工法)이란 흙으로 성벽을 쌓으면서 성벽 내부에 풀잎과 나뭇가지를 깔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다져 올리는 기법을 의미한다. 부엽공법은 땅이 낮고 축축한 곳에 주로 사용되는데, 부여 나성에서는 사시나무와 대추나무를 잘라서 가지런하게 배열하고 그 위에 성벽을 쌓아올린 것을 말한다.

현재 동나성 남쪽 성벽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으로 쌓은 부분이 함께 드러나며 남쪽으로 서서히 이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필서봉(筆書峰)이라는 산봉우리까지 성벽이 올라가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대로 백마강까지 성벽이 이어진다. 동나성 북쪽 성벽은 능산리사지 북쪽으로 이어진다. 발굴조사 결과 치성과 성문의 흔적이 드러났으며, 성벽 또한 견고하게

쌓아졌음이 확인되었다. 치성은 방어를 목적으로 한 시설로, 성벽 라인에서 튀어나온 성벽 구간을 의미한다. 동나성 북쪽 성벽에서 발견된 곳은 길이 22m, 너비 5m, 높이 7m로 조사되어 삼국시대 최대 규모로 손꼽힌다. 일부 성돌에는 ‘부토(扶土)’와 ‘궁토(弓土)’ 등과 같이 글씨가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나성 성벽 북쪽의 청산성과 월함지

동나성 성벽 북쪽은 석목리(石木里)라는 마을까지 이어진다. 석목리에서 청산성으로 가는 길은 논밭이 펼쳐져 있다. 이 중에서 논밭을 가로지르는 논길 구간이 옛 성벽 구간으로 보고 있다. 월함지(月含池)는 현재는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못의 이름이다. 거무내, 뒷개라고도 하며 청산성의 동남쪽 일대에 위치한다. 지금은 작은 연못으로 남아 있으며, 월함지라는 표지석이 있어서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월함지는 말 그대로 ‘달을 머금은 못’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의 궁남지가 그 실체에 의문이 있는 것과는 달리, 월함지는 예로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왔으나 농경지로 개발 되면서 묻혀버린 유적이다.

청산성(靑山城)은 동나성 북쪽 끝단에 위치한 둘레 500m 정도의 작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현 동쪽 1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1,800척에, 높이가 5척이며, 그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도로변에서부터 산 위까지 성벽이 이어지며, 산 정상을 둘러쌓은 형태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각산성과 동일한 성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예로부터 부여 사람들이 이 산을 ‘풀뫼’ 혹은 ‘뿔뫼’라고 불러서, 이를 한자로 ‘청산성(靑山城)’ 혹은 ‘각산성(角山城)’이라 부르고 있다.

청산성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정비된 모습을 하고 있다. 성 내부에 건물지들이 발견되었는데, 건물지의 단을 약간 높게 쌓고 그 위에 나무와 흰 밧줄을 이용하여 유구 라인을 표현해 놓았다. 이를 통해 청산성 내부의 건물지 형태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청산성에서는 부소산성과 백마강 북쪽을 바라볼 수 있다. 백제 시대에 이곳은 사비에서 웅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면서 방어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 또한 당시 군대가 주둔하였던 흔적으로 생각된다.

서나성과 남나성은 존재했을까?

부여 나성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제기되는 논란은 서나성과 남나성의 존재이다. 동나성의 존재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으며, 그 구간에 유적이 잘 남아 있다. 유적이 남아 있지 않은 지역도 대략적으로 성벽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추정·복원이 가능하다. 북나성 구간은 부소산성이 대신 위치하고 있으며, 나성은 청산성에서 부소산성으로 이어지는 구간에 일부 성벽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서나성과 남나성은 현재 명확하게 그 존재가 규명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운 점이다. 서나성과 남나성의 존재는 이전부터 거론되었으며 일부 구간을 나성터로 보기도 하였다. 부소산성 서편의 나루인 구드래 쪽에 ‘나성로’라는 도로명이 존재하는데, 이는 해당 지역을 서나성이 위치한 지역으로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백마강 강가에 인접해 있는 제방을 서나성과 남나성 일대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 일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한 결과, 나성 성벽으로 추정할만한 유적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현재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지리적인 위치의 면에서나 현지 주민들의 전언 등을 참고하였을 때, 서나성과 남나성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정작 고고학적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은 서나성과 남나성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서나성과 남나성 일대는 어떻게 방어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서나성과 남나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들은 저습지여서 별도의 방어시설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굳이 성벽을 만들지 않더라도 적의 침략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소 위험성이 있다. 강은 폭우가 내리면 범람을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제방을 쌓아놓아야 한다. 제방의 역할이 곧 성벽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는 서나성과 남나성의 존재로 볼 수 있다. 저습지였다고 해서 방어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서는 660년에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인문이 백제로의 진격을 하기 위해 주요 거점이었던 기벌포를 공격할 때,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아 공격하게 하여 승리했다고 하였다. 즉 저습지라고 해서 무조건 방어에 유리하다고만 볼 수는 없으며 기본적인 방어 시설은 갖춰져야 한다.

백마강 일대는 예로부터 범람이 잦았으며, 이 때문에 조선 시대 고을의 수령 등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인 동헌과 객사는 다소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였다. 백제의 수도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형태의 방어 시설이 갖춰져야 한다. 공산성이나 부소산성과 같은 성곽도 강과 인접한 곳에는 모두 성벽을 쌓았다. 제방 형태 혹은 그 위에 설치한 울타리와 같은 목책 형태의 성벽이라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성벽의 흔적이 사라지거나 강의 범람으로 쓸려나갔으며, 이 때문에 현재는 유적이 확인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나성과 남나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부여 나성을 사비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으로 역사적으로 그 사례가 드문 유적이다. 백제의 도성을 에워싸고 있어서 왕경과 지방을 구분한다는 점, 각종 주요 유적과 서로 인접하며 연계성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국제적으로도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로 지정하게 되었다. 부여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여유 있게 나성 성벽을 따라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

문화유산 송영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