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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트래블] 소백산 맑은 물이 흐르는 선비의 고장 ‘영주’

한국의 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

고경희 기자 ggh@newsone.co.kr  / 2017-01-13 13:56:39

[사진] 소백산 국립공원

경북·충북·강원 3도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영주는 한국 유·불 문화의 발상지이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가 있고,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 선생의 출생지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건국에 기여한 민본정치가 정도전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넓고 높게 솟은 소백산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전통문화 유적과 얼이 깃든 곳이다.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선비의 고장 영주에서 한국의 미를 찾아보자.

언제 찾아도 아름다운 ‘소백산 국립공원’

빼어난 절경과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소백산은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 하나이다.

198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소백산은 한반도의 남단을 북동과 서남으로 양분하며, 비로봉을 비롯해 국망봉, 연화봉, 제2연화봉을 거느린 소백산맥의 모산이다.

철쭉으로 아름다운 봄에는 매년 소백산에서 철쭉제가 열리고 여름에는 원추리꽃이 아름답게 무리지어 핀다. 온 산이 붉게 물드는 가을을 지나 겨울에는 산 능선 곳곳에 눈꽃나무가 등산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소백산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역사 깊은 명승지와 절경 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보기 드물게 해발 850m 고지에 자리한 ‘희방폭포’는 높이 28m의 웅장한 폭포로 거대한 암벽사이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울창한 숲 사이로 소백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과 바위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죽계구곡’은 초암사에서 발원하는 제1곡으로 시작돼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경치가 이어져 옛 선현들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

‘2011년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소백산자락길’은 각 테마별로 구성된 12자락길로 많은 등산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3자락에 위치한 ‘죽령옛길’은 옛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예로부터 죽령을 ‘아흔아홉 굽이에 내리막 30리 오르막 30리’라고 했는데, 한양과 경상도를 잇는 최단 경로인 탓에 사람들은 힘들어도 이 험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는 선비, 허리품에 짚신을 지고 봇짐과 행상을 지고 힘든 길을 이어가는 보부상, 부임한 지역으로 오가는 관리 등 다양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며 숨 가쁘게 걸었던 천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길이다. 함께 소백산 12자락 길을 따라 떠나보자.

소백산을 끌어안은, 배흘림기둥의 천년 고찰 ‘부석사’


[사진] 부석사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었다. 무량수전 안양문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中

영주시 봉황산 중턱에 위치한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있을 때 머물던 집 딸인 ‘선묘’의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여인 선묘는 의상대사를 사모하였으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슬퍼하며 바다에 몸을 던지고 용이 된다. 이후 부석사를 창건할 때 바위를 하늘로 들어 올려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무리들을 물리치고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이에 ‘뜰 부(浮)’, ‘돌 석(石)’ 자를 써서 부석사(浮石寺)라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석사를 향하는 길은 수려한 은행나무들로 가득하다. 이후 일주문, 천왕문, 범종각, 안양루를 지나면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에 도착한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목조구조 기술의 정수라는 배흘림기둥이 있어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며 우리나라 목조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함,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 천년의 세월이 살아 숨 쉰다. 상쾌한 균형과 절제가 있는 무량수전은 사뿐히 고개 쳐든 지붕의 추녀 곡선, 추녀와 기둥의 조화, 간결하고 절제된 주심포로 절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무량수전은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며, 무량수전의 현판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르는 동안 쓴 친필로 알려져 있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 외에도 소조여래좌상, 석등, 조사당, 조사당 벽화 등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 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고려목판, 북지리석조여래좌상, 부석사당간지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선묘와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부석을 부석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부석사는 일출·일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동편에 위치한 원융국사비에서는 산사를 밝히는 일출이, 무량수전 앞에서는 소백산맥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부석사가 안은 소백산의 풍광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충·효·예·학이 살아 숨 쉬는, 선비정신의 산실 ‘소수서원’


[사진] 소수서원

조선시대 민족교육의 산실이자 인재배출의 요람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으로 수많은 명현 거유를 배출했으며, 학문탐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많은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역사의 깊이와 학문의 심오함이 서려있는 소수서원은 충·효·예·학이 살아 숨 쉬는, 선비정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 선생의 연고지에다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 학사를 세워 백운동(白雲洞)서원을 창건한 데서 비롯된다. 이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나라에 상소를 올려 명조 5년(1550)에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으면서 서원의 이름을 바꿨고, 이는 사액서원의 효시가 됐다.

소수서원 매표소를 지나면 ‘학자수’라 불리는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오랜 시간 강학당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학자가 다 됐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조금 더 걸으면 소수서원을 휘감아 도는 죽계천이 펼쳐진다. 세조 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가 관노의 고변으로 탄로가 나면서 이 고을 유생과 주민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사건으로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죽임을 당한 주민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듯 죽계천에 수장돼 그 핏물이 10여 리나 흘러 멎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죽계천 맞은편에는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의 취한대(翠寒臺)와 주세붕 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전해지는 경자바위가 있다. 주세붕 선생은 선비정신의 핵심을 ‘경(敬)’ 사상으로 보고 유생들이 통학 길에 경자바위를 보며 매일 자신을 올곧게 곧추세우기를 바랐다. 그는 이 ‘경’ 자가 천년 후에도 마멸되지 않고 보존되기를 바라면서 바위에 정성들여 각자 했다.

지도문을 통과해 서원으로 들어가면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강학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러놓은 구조가 인상적이다. 이곳에 서서 유생들의 글 읽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강학당 왼편에는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가 있다. 서원은 선례후학(先禮後學)의 기치 아래 제사와 인재양성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하게 돼 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을 모시는 향교와 달리, 서원은 그 지방 출신 연고자 중 훌륭한 이들을 모시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찾는 정신이라고도 해석된다.

서원 내에는 제사용 그릇을 보관해두던 ‘전사청’, 유림들이 유숙하던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 안향 선생을 비롯한 여섯 명의 초상을 봉안한 ‘영정각’, 소수서원에 대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관련 자료를 정리해 전시해놓은 ‘사료관’ 등이 있다.

백운교를 지나면 성리학을 주제로 선비문화를 조명한 한국 유일의 유교 종합박물관 ‘소수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그 옆으로는 영주시내 문화재급 고택들을 실측해 인공적으로 조성해놓은 ‘선비촌’이 자리해 있다. 선비촌은 영주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했으며 그들의 정신을 담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無求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의 4가지 구역으로 조성됐다. 선비촌에서는 숙박 체험도 가능하며 바로 옆 한국선비문화수련원에서는 선비문화도 배워볼 수 있다고 한다.


[사진] 선비촌

외나무다리 건너 육지 속 섬마을로의 여행 ‘무섬마을’


[사진] 무섬마을

영주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쯤 들어가면 마치 물 위에 뜬 연꽃 모양의 마을이 나타난다.

태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발원한 서천이 만나,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휘돌아가는 모습이 꽤 인상적인 이곳은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 하여 ‘무섬마을’이라 이름 지어졌다. 전형적인 명당,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진 이곳은 마을을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금모래 백사장, 초록빛 산, 고색창연한 고가(古家)가 어우러져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고 있다.

‘2015년 한국관광의 별’, ‘중요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선정되기도 한 무섬마을은 박남 박씨의 ‘박수’가 1666년 무섬마을에 처음 터를 잡고, 100여 년이 지나 그의 증손녀 남편인 선성 김씨의 ‘김대’가 데릴사위로 들어오면서 현재까지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영주에서 알아주는 반촌(班村)으로 약 350년의 역사를 간직한 무섬마을은 현재 26채 가옥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관광안내소를 지나 처음 만나게 되는 가옥은 ‘해우당고택’으로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이곳의 ‘해우당’ 현판은 흥성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조금 더 걸어가면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처가 ‘김뢰진家(만운고택)’와 무섬마을을 개척한 반남 박씨 ‘박수’가 1666년에 지은 ‘만죽재’가 나타난다. 조선의 역법을 완성한 김담 선생의 종택 ‘김광호家(무송헌종택)’도 만나볼 수 있다. 관광안내소 왼편에 위치한 ‘아도서숙’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김화진 선생과 김성규(조지훈 시인의 장인) 선생 등이 건립한 것으로, 1933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숙될 때까지 농촌계몽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던 영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무섬마을에는 없는 것이 3가지라고 하는데, 바로 농토, 도둑, 우물이다. 성씨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 도둑이 없었고, 마을이 마치 배가 떠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배 밑에 구멍을 내면 안 된다고 하여 공동우물을 만들어 길러다 먹었다고 한다. 농토는 강 너머 있었기에 매년 외나무다리를 만들어 그 위로 다니면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현재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는 S자 곡선을 그리며 아름다운 정취를 만들고 있는데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무섬마을에 방문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가을이면 담 넘어 호박, 박 등이 익어 한가로운 고향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이곳은 많은 관광객들이 고택 숙박 체험을 하러 오는 곳이기도 하다. 무섬마을에는 9채의 가옥이 경북문화재자료 및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돼 있으며, 역사가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있다. 마을의 어느 집이든 숙박이 가능하며, 머무는 동안 전통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후덕한 인심도 경험해 볼 수 있다. 마을 내에는 숙박·교육·놀이 시설 등을 갖춘 한옥체험수련관과 무섬마을 자료 전시관도 있으니 참고하자.


고경희 기자 ggh@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