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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 트래블] 서해안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당진’

문화관광저널 고경희 기자 ggh@newsone.co.kr  / 2016-05-16 12:00:02

완만한 구릉지와 평야지대로 이뤄진 당진은 최고봉인 아미산(349.5m)을 중심으로 남고 · 북저의 지형을 띄고 있다. 또한 서해와 아산만을 중심으로 약 52km의 긴 해안선이 펼쳐져 있어 바다와 땅의 풍요를 함께 담은 도시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출, 일몰, 월출 광경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왜목마을’부터 해수욕과 래프팅, 갯바위낚시를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섬안의 해수욕장 ‘난지섬’, 그리고 천주교 순레성지이자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고향인 ‘솔뫼성지’까지 당진에는 철강도시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아름다운 자연 명소들이 즐비했다.

‘왜목마을’, 서해바다에서 일출을 감상하다

왜목마을은 충남 당진시 서해의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이름 ‘왜목’은 마을의 지형이 왜가리 목처럼 가늘고 길게 뻗어나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바다를 동서로 양분하면서 당진시의 최북단 서해바다로 가늘고 길게 뻗어나간 특이한 지형을 보인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해가 뜰 무렵 마을 바닷가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서해바다의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왜목마을에서 바다건너 동남쪽 3km 전방을 보면 바다에 면하여 우뚝 솟은 노적봉과 장고항 언덕사이 붓을 거꾸로 꽂아 놓은 듯 문필봉 같은 바위가 눈길을 끈다. 오래전부터 왜목마을에서 관망되는 이 바위는 자연의 비경을 찾아다니는 사진작가들의 눈길을 끌었고, 곧 입소문이 나면서 출사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서해바다에 떠오르는 일출도 일출이거니와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바위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은 자연의 신비와 오묘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남아선호사상이 유별났던 우리나라의 손 귀한 집안사람들은 이를 남근바위라 믿고 해 뜰 무렵 찾아와 바위를 바라보며 아들 낳기를 기원했다는 속설 또한 전해진다. 이 바위가 남근바위라고 알려진 유래를 보면 왜목마을 사람들의 가족력과도 관련이 있는데, 마을을 통틀어 예닐곱 가구에 불과하고 자동차 길도 닿지 않는 오지 갯마을이었던 시절. 아들 일곱에 딸 하나라 할 정도로 왜목마을엔 딸 가진 집이 귀했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마을에 양기가 세서 그렇다고 생각했고, 그 연원을 남근바위에서 찾았다는 속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바위는 ‘촛대바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당진 서해바다 촛대바위의 일출은 이제 한국의 명승이 됐다. 아침 해가 촛대바위에 걸리는 시기는 2월과 10월이다. 7~8월은 노적봉과 국화도 사이 바다로 뜨는 해를 볼 수 있다. 왜목마을의 일출은 일 년 중 하지와 동지를 기준으로 해 뜨는 위치가 달라 장고항과 국화도 사이로 유동적이다. 동해의 일출이 정열적이라면 왜목마을의 일출은 서정적이라 할 수 있다.

석문산에서 바라보는 왜목마을의 일몰

그러나 1984년 대호방조제 준공 이후 왜목마을의 서쪽 일대가 육지로 변하면서 마을을 감쌌던 서쪽 바다는 사라졌다. 왜목마을을 포함하고 있는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에서부터 교로리와 같은 면에 속한 섬 도비도, 그리고 서산 대산항까지 총연장 7,8km의 대호방조제 공사가 준공됨으로써 왜목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옛 지형을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바다 대신 농토가 풍요롭게 펼쳐졌다.

해발 70m가량의 왜목마을 뒷산인 석문산 정상에 오르면 왜목마을 서쪽에 바다대신 광활하게 펼쳐진 대호간척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이곳에서 뒤를 돌아보면 서해의 푸른 바다 풍광을 마주할 수 있다. 이처럼 대호간척지와 왜목의 서해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석문산 정상은 일몰을 볼 수 있는 왜목마을의 또 다른 명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석문산 정상을 가자면 왜목마을 해양경비초소 옆으로 난 탐방로를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정상에 이른다.

방조제공사 전 농사지을 땅이 없었던 왜목마을 사람들은 갯가에서 나는 해산물에 목숨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했다. 마을을 통틀어 예닐곱 가구가 전부였던 터라 어장을 꾸릴만한 큰 배도 없어 어부로서의 생업도 이어가지 못했다. 마을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마을 앞바다였다. 이곳에 물이 빠지면 지천으로 드러나는 자잘한 갯바위는 겨울철 마을사람들의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바다에 펼쳐진 크고 작은 갯바위들은 자연산 굴의 서식지로 마을 사람들은 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굴, 일명 ‘석화’로 불리는 굴을 따다 장에 내다팔기도 하고 농사짓는 이웃마을에 가 곡식과 바꿔먹기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마을 앞바다에서 갓 채취한 신선한 자연산 굴 맛은 왜목마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어떻게 먹어도 입에 달라붙는다.

모래사장과 갯바위 너덜지대가 혼재돼 있는 왜목마을 해변은 국화도가 마을 앞바다를 수놓고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수평선만 빤히 보이는 망망대해보다는 심심치 않게 즐기는 눈맛이 있다. 왜목마을의 해변에서 낭만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은 그래서 더욱 풍요롭다. 더욱이 관광객들이 해안선 따라 맨발로 안전하게 산책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수변데크를 이용하면 아름다운 해변을 거닐며 여유 있는 시간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서해대교]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출, 일몰, 월출 광경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왜목마을은 장고항 용무치부터 경기도 화성시 국화도를 사이에 두고 시기별로 위치가 바뀌면서 일출과 월출이 이뤄진다. 일몰은 당진시 석문면 대난지섬와 소난지섬 사이의 비경도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다도해의 풍경 속으로, 섬안의 해수욕장 ‘난지섬’

난초와 지초가 많이 자생한다 하여 이름 붙여진 ‘난지섬’은 도비도 선착장에서 여객선을 타고 들어간다. 배를 타고 대난지섬으로 향하면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서해의 다도해 풍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객선을 타고 서해의 푸른 바다에 기암괴석을 거느린 크고 작은 섬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반달모양으로 해안을 감싸고 있는 송림과 백사장이 펼쳐진 섬 안의 해수욕장에 닿게 된다.

난지섬은 바닷가 모래사장이 발달돼 있고 수심도 완만해 해수욕장으로서 안성맞춤이다. 더불어 해양레포츠에 최적의 자연환경을 제공한다. 30분가량의 뱃길로 연결되는 이곳은 육지의 해수욕장처럼 해수욕객들이 많지 않아 조용한 섬마을의 가족여행지로도 제격이다. 해수욕장 인근의 갯바위 낚시는 전문 낚시꾼들도 찾아오는 바다낚시의 명소여서 해수욕과 함께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이다.

한편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실 33개 규모로, 교육관, 종합운동장, 훈련장 등의 실내외 시설이 마련돼 있는 청소년 수련원이 해수욕장 뒤로 위치하고 있는데, 이 수련원은 여름철 ‘바다 래프팅’이라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서 여름휴양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또한, 대난지섬는 멸종위기 종인 가시연꽃과 해당화가 자생하고 있으며, 해안에는 천연기념물 제326호로 지정된 검은머리물떼새가 서식하는 등 생태의 보고이다. 이 섬은 갯벌이 잘 발달돼 있고, 갯벌에서는 바지락과 굴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검은머리물떼새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 새는 ‘굴새’라 불릴 정도로 굴을 좋아하는 새로 유명하다.

매년 겨울철이면 검은머리물떼새 외에도 많은 종은 아니지만, 오리류와 기러기류가 월동하는 곳이 난지섬이다. 갯벌로 철새들의 먹잇감이 풍부하고 섬 주변에 새들이 서식하기 좋은 무인도가 많아 새들에게 매우 좋은 환경을 제공하며, 철새들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천주교인의 순례성지, 김대건 신부의 고향 ‘솔뫼성지’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으로,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으로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함께 마련돼 있어 성지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제법 나이 먹었음 직한 소나무들이 동산에 가득 숲을 이룬 곳 솔뫼. 솔숲을 거닐던 중 자세가 바르지 않고 휘어 자란 소나무들의 모습에서 문득 느낀 애처로움은 증조부, 조부, 부친 그리고 자신까지 4대가 순교한 인물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100년여의 세월 동안 박해를 받아온 천주교 역사 중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1822-1846). 신심(信心)만 내려놓았다면 해방될 수 있었음에도 온갖 핍박에 아랑곳없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갔던 인물이다. 부귀영화에 아랑곳없이 가진 것을 나누며 신자를 돕고 의지했고, 고난의 세월을 딛고자 했던 성인. 그에게 있어 박해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참된 진리를 얻기 위해 감내할 수 있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천주교 103인 성인 중 하나로 추앙받는 그의 생가 뒷동산을 거닐다 보면 여느 소나무 숲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소나무 숲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김대건 신부 동상 뒤 하얀 탑은 성모의 모습을 형상화한 탑으로 신자를 돌보고 있음을 상징한다. 믿기에 의지하고 사랑하기에 믿음을 준 성자와 성모의 상을 함께 바라보자니 사람은 믿음으로 살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에 위치하고 있는 솔뫼성지는 사적 제529호로 지정돼 있다.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출생한 곳으로 그의 생가와 동상,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국내 제1의 가톨릭 성지로 명성이 자자한 이곳은 1984년 5월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내한한 교황요한바오로 2세로부터 그가 성인으로 시성된 후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공경의 대상이 됨에 따라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솔뫼성지를 방문한 요한바오로 2세]

순교 100주년을 맞은 1946년 성역화 사업이 시작돼 기념비와 동상 등이 건립된 이곳에 담으로 둘러싸인 성지의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에 김대건 신부가 나고 자란 생가터에 다다른다. 단아한 모습의 한옥과 함께 그의 상이 마련된 생가터는 그의 증조부 김진후, 조부 김한현, 부친 김제준, 그리고 자신까지 4대가 살았던 곳으로 4대가 순교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는 면천 군수로 있을 때, 내포의 사도 이존창으로부터 전교를 받은 후 벼슬도 버린 채 신앙생활에 전념함으로써 박해의 시련을 피해갈 수 없었다. 홍주, 전주, 공주 등의 감옥에 갇혔다가 1814년 해미에서 76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증조부가 10년간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여 성장하게 된다. 1836년 16세 때 신학생으로 뽑힌 그는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해 1845년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그 해 10월 귀국한 그는 ‘은이’ 마을에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귀국한 지 불과 1년이 지나기도 전인 1846년 6월에 체포돼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하기에 이른다.

생가터를 지나 성지의 남쪽 끝은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와 천주교 박해역사를 둘러볼 수 있는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의 활동과 업적, 체포와 순교 4대 박해, 한국교회사 등에 관한 자료와 함께 희귀 성물도 전시되고 있어서 천주교의 생활문화도 엿볼 수 있다.


문화관광저널 고경희 기자 ggh@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