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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문화교류의 동향과 과제

  / 2016-04-14 16:26:14

<전문가기고-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1. 장위안, 한중 문화교류의 키워드
장위안(張玉安). 중국에서 방송 아나운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학원 강사를 하던 서른 남짓한 청년. 2015년 한국과 중국 사이 문화 교류의 성과를 보여주는 키워드로서 손색없는 이름이다. 그는 2014년 여름부터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훤칠한 외모와 뒤지지 않는 한국어 솜씨, 가끔은 강단 있는 주장에 한국 대중이 매료됐다. 장위안은 적어도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 인식을 바꿔 놓는데 성공했다.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몇 해 전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중국은 한국인이 싫어하는 나라 중 일본에 뒤이어 2위에 올랐다.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이미지도 좋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런데 장위안이라는 캐릭터는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인식과 이미지를 뒤바꿔 놓았다. 멋지고 똑똑한 중국 남자의 위력이 발휘된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모은 중국인은 그 전에도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활약했던 탁구 선수 쟈오즈민은 한국 선수 안재형과 결혼하면서 대중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결혼은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슈퍼주니어 멤버로 활동했던 한경이나 EXO-M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아이돌, 김태용 감독과 결혼한 여배우 탕웨이 등도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스타들이다. 장위안은 그 중에서도 활약이 컸다. 무엇보다 그는 주기적으로 방송에 등장하면서 친근하게 접근해 왔다. 또 출연하는 프로그램 성격상,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해야 하는 캐릭터로 자리 잡으면서 지적인 이미지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동안 한국 연예인들이 중국에서 인기를 얻은 경우는 많았지만, 그 반대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한중 대중문화 교류가 불균형하다는 평가를 자주 받아오던 터였다. 장위안의 등장은 이런 불균형을 조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 열어 주기도 했다.

2. ‘공식’ 문화교류, 22년
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사실 두 나라 관계는 ‘문화교류’라는 조금 딱딱한 이름으로 설명하는 게 머쓱할 정도다. 역사가 생겨난 이래, 둘 사이의 관계가 없었던 적은 없다. 그래서 1949년 대륙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기까지 40년 남짓한 시간의 의미는 더 각별하다. 유일하게 상호 교류를 수행할 수 없었던 단절의 시간, 한국과 중국은 각자 격변의 세월을 보냈다. 1992년 ‘수교’라는 이름으로 공식 관계를 회복했으나 두 나라는 서로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수교 이후 서먹한 상황을 타개하고 활발한 교류를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시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4년 두 나라 정부는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교육, 학술, 문화, 예술, 언론,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출판, 청소년 및 체육 분야에서 교류 협력 증진을 약속했다. 이로 인해  상대 국가에서 취득하는 학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다양한 문화 예술 교류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협정의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 ‘문화공동위원회’를 열기로 합의했고, 실제로 2년마다 이 위원회를 통해 다양한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조직해 왔다. 활발한 인적 교류가 시작됐고, 조금 더 개방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던 한국 대중문화가 중국에 먼저 소개되는 기회를 갖게 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불붙기 시작한 ‘한류’ 열풍도 이러한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중국에서 한류를 선도했던 <사랑이 뭐길래>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가 1997년 중국중앙방송(CCTV)을 통해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제도적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011년까지 여덟 번 개최된 ‘문화공동위원회’는 2013년 ‘인문교류공동위원회’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양국이 ‘인문유대 강화’에 합의한 뒤, 그 정신을 살리기 위해 위원회를 개편한 것이다. ‘인문유대’는 유구한 역사에 축적돼 온 공통된 문화적 자산으로서 ‘인문’적 요소를 바탕으로 단순한 ‘교류’를 넘어서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유대’의 층위까지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문교류공동위원회는 2013년 서울, 2014년 시안(西安), 2015년 제주에서 각각 열렸다. 이를 통해 인문교류 정책 포럼, 청소년 교류 및 장학 사업, 전통예술 체험, 인문교류 테마 도시 등에 관한 사업을 기획해 왔다.

3. 풀뿌리 한중 문화예술 교류
정부 간 공식적인 교류의 틀은 반드시 저변의 자발적인 흐름이 있어야만 더욱 빛날 수 있다. 문화 예술이 갖는 고유한 특성인 창의력과 상상력이 발휘되는 풀뿌리 교류가 없다면 한중 간 문화 교류는 금세 의미를 잃고 말게 될 것이다.
풀뿌리 교류의 아이콘으로는 역시 ‘한류’를 꼽아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한류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대중가요, 영화 등의 영역을 통해 눈부시게 활약했다. <사랑이 뭐길래> 이후, <별은 내 가슴에>, <가을동화>, <대장금> 등과 같은 드라마가 크게 인기를 끌었고,  H.O.T, 클론, NRG, 베이비복스 등의 대중가요가 유행했으며, <엽기적인 그녀>를 필두로 많은 한국 영화가 중국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한류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이러한 현상은 최근 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방송 분야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다.
문화교류란 말 그대로 ‘교류’, 즉 내 것을 남에게 주고, 남의 것을 받아들인다는 전제 위에서 시작돼야 한다. 물론 문화의 속성 때문에 어느 정도 기울기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기울기가 지나쳐서 불균형이 가속화되면 궁극적으로는 양쪽 모두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문화는 새로운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국 모두 진출(outbound) 뿐만 아니라 진입(inbound)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한중 영화 교류는 2014년 ?한중영화공동제작협정?의 체결(이후 ?한중FTA협정?의 부속 문건으로 편입)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자국 영화를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은 중국으로서는 한국영화의 다양한 자원을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영화 산업에 투자되는 막대한 자본과 실무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선진화된 영화기술과 기획 및 제작 등 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상호 결합을 통해 많은 이들이 새로운 공동제작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 역시 한중 간 불균형 현상을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한국영화가 중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동안, 한국에서 개봉되는 중국영화는 소리 없이 스크린에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해결책은 중국영화의 질적 수준 향상과 한국 관객에 대한 타겟팅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중국을 한국영화의 시장으로만 간주하지 말고, 중국영화가 100년 넘게 축적해온 다양한 자산들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침으로써 양국 영화 관객의 상호 이해를 넓혀가야 할 필요가 있다.

4. 마치며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에게 있어 중국과의 문화교류는 언제나 불변하는 상수(常數)라고 보아야 한다. 21세기 한중 문화교류는 오천년 역사 이래 한류라는 새로운 전기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문화는 물처럼 흐른다. 아시아에서 일본문화와 홍콩문화의 유행에 뒤이어 나타난 한류는 언젠가는 중국 중심의 문화적 흐름에 그 물길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J-Pop과 캔토니즈 팝(Cantonese Pop), K-Pop에 뒤이어 만다린 팝(Mandarin Pop)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측을 전제로 한과 중국, 두 나라 문화 교류를 더 긴 안목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임대근 한국외대 대학원 글로벌 문화콘텐츠학과 및 중국어통번역학과 교수(중국영화포럼 사무국장)는 한국외대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대학원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영화와 한-중 대중문화, 문화콘텐츠 등을 양국 문화 교류 및 상호 인식의 관접에서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