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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여행길에서 역사를 읽는다

정지영 기자 winji365@newsone.co.kr  / 2015-10-18 12:47:09


계절에 따라 찾고 싶은 도시가 있다. 전라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정읍시는 사색의 계절 가을이 어울리는 곳이다. 내장산과 옥정호는 단풍과 물안개로 가을 정취의 정점을 보여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처음 현감을 지냈으며, 동학농민운동과 백제가요 정읍사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즐기며 역사의 현장을 둘러 볼 수 있다. 여기에 육당 최남선이 조선 3대 명주(名酒)로 손꼽은 죽력고가 있고 민물 참게장 백반과 산채정식이 유혹하는 곳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를 찾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사적 제295호)는 1894년 반부패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로 관군을 크게 이긴 최초의 전승지이다. 이곳에 자리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이를 기리고, 이곳이 이후 당시의 농민봉기가 단순한 봉기가 아닌 ‘혁명’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성지임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됐다.

황토현은 야트막한 고갯길이다. 고도가 35.5m 정도에 불과한 작은 언덕이지만 역사적 배경이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고자 전봉준장군의 지휘 하에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조병갑을 축출한 농민군은 이후 신임군수 박원명의 수습으로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지방의 소란을 알아보러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가 농민들의 잘못이라며 주모자의 집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태인의 접주 김개남, 손화중과 더불어 지금의 김제 백산에 모여 다시 봉기하기에 이른다. 백산봉기다. 除暴救民 保國安民이라고 쓴 깃발 아래 모인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돌며 뜻을 같이할 동지들과 규합하고 전라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조정은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전주성에 머물고 있던 전라도 관군을 정읍으로 파견하지만 오히려 동학농민군에 의해 참패하게 된다. 그 역사의 현장이 바로 황토현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조성한 기념관은 보다 정확한 고증으로 동학농민운동에서 보여준 개혁정신과 민족자주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위쪽 벽면에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의 초상과 마주한다. 전봉준 장군부터 손화중, 김개남, 동학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 선생, 의암 손병희 선생의 모습도 보인다.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유물들도 전시돼 있는데 제일 먼저 눈이 간 것은 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작성했던 ‘사발통문’ 원문이다. 거사에 동참했던 송두호의 집 마루 밑에 숨겨져 있던 것이 우연히 발견돼 이곳에 전시된 것이다. 그날의 절박함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 왠지 모를 뭉클함에 숙연해졌다.

기념관을 나와 전봉준장군 동상을 마주한다. 중앙에 전봉준 장군의 전신상이 있고 삼면으로 둘러싼 벽에는 농민군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동상 왼편으로 나 있는 오솔길로 접어들면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있다.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해서 제일 먼저 세워진 것으로 1963년에 건립된 것이라 한다. 탑을 중앙에 두고 두 기의 비석이 있고, 비석 한 편에 구전가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가 새겨져 있다. 눈이 아니라 소리로 읽는 자신을 보며 세월도 비켜가질 못할 구전가요의 힘을 떠올렸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살았던 이평면 조소리 전봉준 장군의 고택도 사적 293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니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시와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전 국민에게 알리고 혁명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해 매년 5월이면 황토현전적지와 시내 일원에서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를 연다. 48회를 맞은 올해 기념제에선 무명동학농민군위령제를 시작으로 제5회 동학농민혁명대상 시상식, 갑오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구민사 제례 및 갑오선열 위패봉안례, 무명동학 농민군 위령제, 전국 청소년 토론대회, 황토현전국역사페스티벌, 전국농악경연대회, 동학농민혁명 121주년 특별전 등이 개최됐다.

 

천년의 기다림, 정읍사문화공원

‘달하 노피곰 노다샤’로 시작하는 정읍사(井邑詞)는 한글로 된 백제 유일의 가요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악지’삼국속악 백제 ‘정읍’(노래의 이름)에 의하면 ‘정읍은 전주의 속현이다. 고을 사람이 장사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 그 아내가 산의 돌(바위)에 올라 바라보며 남편이 밤에 오다가 진흙탕물 에라도 빠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기다림 속에 안녕을 기원하는 가요 한편을 지어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인 것이며, 세상에 전해 오기를 고개에 망부석이 있었다고 한다. 

정읍시가 이를 기리고자 1985년 시기동 아양산 동쪽에 조성한 것이 정읍사공원이다. 리모델링을 거쳐 올 4월에 정읍사문화공원이라는 새이름으로 개장됐다.

넓다란 잔디광장은 불과 1년전 만 해도 가파랐다. 이로 인해 어린이와 몸이 약한 이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14년 언덕을 낮추고 달 조형물 설치와 숲 속 시설물 등을 정리했다. 이로써 ‘무장애 공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특히 전면을 개방해 망부상 조망권을 확보했다.

달 조형물과 LED경관 등을 비롯한 최적의 조도를 갖춘 조명도 설치해서 아름다운 야관경관을 연출, 밤의 정취를 즐기고자 하는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휘영청 밝고 둥근 보름달이 망부상 곁을 지키고 있다. 망부상 옆에 보름달 조형물이 설치된 것이다. 1천400여젼 전 백제시대 젊은 여인이 멀리 행상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안위를 빌고 빌었던 그 달님이다.

정읍사 노래비와 망부석 설화를 형상화한 이야기마당도 만들어져 있다. 한발 한발 영인과, 남편 혹은 아내와 손잡고 다정하게 오를 수 있는 사랑의 계단 등 시설마다 정감어린 이름이 붙어 있어 더욱 친근하다.

너른 공간에 시설물이 여유 있게 배치돼 있어 즐기는데 피로감이 없는 것도 좋다. 탁 트인 잔디밭을 가볍게 걷는 것만으로도 몸과 머리가 맑아진다. 개장 시간제한이 없어 가벼운 산책 코스로도 제격이다.

계단 앞에서 잠시 망설였던 마음을 다잡고 망부상 옆에 서니 정읍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여 년 넘게 남편을 기다려온 아내는 아직도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듯해 망부상을 따라 멀리 시선을 던져본다.  



 

선홍빛 열정에 마음을 뺏기는 내장산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인 성임은 자신이 지은‘정혜루기(定慧樓記)’에서 ‘방박(磅?)하게 솟아 기세가 매우 위험하고 경계가 더욱 빽빽하니, 참으로 필추(苾芻, 비구승)들이 선(禪)에 들어가 도를 배울 좋은 땅’이라고 내장산을 소개한다.

‘산 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해 칭명된 것이 내장산이다. 신선봉을 주봉으로 해 까치봉, 연지봉, 망해봉, 불출봉, 서래봉, 월영봉, 연지봉 등 9개의 봉우리가 말발굽처럼 드리워진 특이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굴거리나무 등 760여 종의 자생식물과 858종의 자생동물이 살고 있다. 전국 8경의 하나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용굴과 금선폭포, 도덕폭포도 품고 있다.

여타의 수식어가 필요 없을 만큼 가을이면 선홍빛 열정으로 내장산을 찾는 이들의 혼을 쏙 빼놓은 까닭에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기도 한다. 단풍만이 아니다. 봄 철쭉과 벚꽃, 여름의 녹음, 겨울 바위의 비경과 설경으로 사계절 볼거리가 풍성하다.

매표소를 지나 탐방안내소부터 내장사까지 이어진 도로엔 이른 가을이 객을 맞고 있다. 기상청은 올해 11월 초순에 이르면 내장산 단풍이 절정에 이를 것이라 예보하고 있지만 내장산을 자주 찾는 마니아들은 그보다 2주 정도 앞당겨 찾길 ‘강추’한다. 절정에 달했던 단풍이 한 번에 떨어질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살짝살짝 물든 단풍들을 보며 길을 걷다보니 절정의 그날을 사진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싶다는 작은 욕망도 생겨난다. 

내장산에 가면 으레 내장사를 들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엔 찾는 의미가 남달랐다.

내장산 연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은 내장사(內臟寺)는 백제 무왕(600~640) 37년인 서기 636년에 영은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수차례에 이르는 화재로 소실과 중창을 거듭했던 천년고찰 내장사는 지난 2012년 또 한 번 뻗친 화마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올해 8월 정면 5칸과 측면 3칸, 50평 규모의 팔작지붕 형태로 복원됐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와 약사여래 부처, 아미타 부처 그리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셔야 하나 약사여래 부처와 아미타 부처를 아직 모시지 못한 상황이었다. 후불탱화도 조성 중이라고 했고, 목재가 건조되는 2~3년 후에는 단청작업도 할 수 있다니 몇 년 후에는 내장사의 모습이 제대로 갖춰질 거 같다.


아흔아홉 칸의 독특한 매력 김동수 가옥

TV에서 사극 드라마를 볼 때 간혹 고관대작, 아흔아홉 칸 집이라는 말을 듣는다. 아흔아홉 칸이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조선시대 전형적인 상류층의 가옥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 정읍에 있다. 

김동수가옥이라 불리는 이곳은 산외면 오공리에 있다. 김동수 씨의 6대조 김명관(1755~1822년)이 조선 정조 8년(1784)에 지은 집이다. 앞에는 동진강의 상류가 서남으로 흐르고, 뒷편에는 해발 150여m의 창하산(蒼霞山)이 둘러 있어 풍수지리에서 명당이라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전에 세운 주택이다. 더욱이 10여 년에 걸쳐 정성을 들인 집이라 하니 호기심이 배가 되었다.

가옥은 행랑채, 사랑채, 안행랑채, 안채, 별당으로 나눠져 있지만 대문에 들어서면 사랑채나 행랑채가 나타나는 일반 사대부집과는 달리 독립된 대문 마당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립자의 독창성도 살아 있으면서 후대로 내려오면서 보수하거나 개조하지 않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가옥 안을 둘러보다 보니 보통 밖에 두는 장독대를 따로 모아두는 창고가 있었고 옛 물건들도 꽤 남아있어 조선조 양반들의 생활양식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집의 주위에는 8채의 호지(護持)집, 노비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2채만 남아 있다.

김동수 가옥을 거쳐 둘러볼 만한 곳으로 호남 제일의 정자로 일컫는 피향정이 있다. 보물 제289호로 지정된 피향정은 앞뒤로 상·하연지가 있어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있었지만 현재는 하연지만 남아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이 태산 군수로 재임해 이곳 연지가를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흐른다.

 

이외에도 정읍에는 볼거리가 많다. 먼저 정읍하면 빠뜨릴 수 없는 게 선비문화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칠보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처음 세워질 때는 태산서원이라 불렸으나 숙종 22년에 무성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을 만큼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는 호남 제일의 서원으로 옛 건물 그대로 남아 있다. 내년 ‘한국이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전국 9개 서원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3열사 중의 한 분인 백정기 의사 기념관 등도 빼놓을 수 없다. 1896년 인근 부안에서 태어난 백의사는 어린 시절 성장기를 정읍시 영원면에서 보냈다. 1920년 경성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34년 일본 장기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기념관은 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열사, 밑 활동상을 전시ㆍ설명하는 구파기념관, 역사의 산교육장인 청의당 강당, 의열문, 승의문 등이 구성돼 있다. 또 송참봉 조선동네도 있다. 이곳은 옛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지만 단순히 관람만 하고 가는 전시형 민속 마을이 아니다. 옛날 선조들이 살던 방식 그래도 먹고 자며 실생활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몇몇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날아간 듯 특별한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