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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없는 박물관’ 안동에서 즐기는 오감만족 유물들

하회마을, 도산서원, 월영교, 안동찜 등 즐길 거리 가득

고경희 기자 (ggh@newsone.co.kr)  / 2015-07-16 11:50:57




















메르스 바이러스가 전국을 강타한 가운데,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건 가급적 피해야 했다. 하지만 업이 업이니만큼, 회사에만 콕 박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7월에 떠나기 좋은 도시’를 독자들에게 추천해야 하는데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일단 전국 팔도에서 메르스 청정지역 리스트를 새로 뽑고,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를 찾으니 ‘안동’이 제격이었다. 이곳이라면 독자들에게 추천해도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만한 곳이었다.

새벽 5시, 여름이라 그런지 이른 새벽에도 사위가 환했다. 배낭에 제일 먼저 넣은 건, 마스크와 손 소독제였다. 안동은 청정한 곳이라지만, 혹시나 필자의 부주의로 인해 안동을 위험지역으로 만들 순 없었다. 메르스로 인해 관광업계 타격도 크고, 내수경제가 침체된 것도 사실이다. 문화관광저널에서 ‘여행기자’로 있는 필자에겐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부디 필자가 보고 듣고 느끼고 기록한 것을 통해 모든 이들이 예전처럼 활기를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채비를 서둘렀다.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한 ‘안동 하회마을’

안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안동 하회마을’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은 지난 1999년 4월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해 유명세를 탄 곳이다. 낙동강 물줄기가 마을 전체를 감싸 안고 굽이굽이 도는 풍산 류 씨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역사 깊은 마을이다.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으며, 조선시대의 양반마을 모습과 전통 한옥의 예스럽고 아름다움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하나의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한 해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하회(河回)’라는 지명은 낙동강 물줄기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만들면서 마을을 감싸는 데서 유래했는데, 전통적인 가옥들뿐만 아니라 곳곳에 문화체험이나, 카페, 식당 등도 있다.

강물이 마을을 휘감은 하회마을은 수령 약 600년쯤 되는 삼신당 신목인 느티나무 한 그루가 중심이고, 강 건너 부용대와 화산이 병풍 역할을 한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대보름날 신목에 제사를 올리고 하회별신굿 탈놀이도 이곳에서 시작하는데, 그 신목과 담장을 사이로 풍산 류 씨 종가인 양진당과 원지정사가 양쪽에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하회탈이 가장 유명한데, 하회탈은 마을에 살던 허 도령이 꿈에 마을의 수호신으로부터 가면 제작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드는 것을 처녀가 몰래 문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자 허 도령이 부정을 타서 죽은 것이 유래라고 한다.

양반과 선비, 파계승 등 다양한 인간들의 위선적인 모습의 가면을 쓰고 춤과 재담으로 서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하회탈은 1954년 미국문화원 대구지역 문화담당관 맥타카드 교수에 의해 처음 학계에 발표된 이후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동·서양에는 탈과 가면 문화가 많지만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어서 보존성이 떨어지고 놀이가 끝나면 대부분 불태워버려서 남는 것이 드문데, 하회탈은 다양한 인물상을 오리나무로 정교하게 깎아서 두세 번 옻칠을 하는 등 세련미와 탈집에 보관해 전수되고 있다. 하회탈은 양반, 선비, 각시, 중, 초랭이, 이매, 백정 등 다양한 12개의 탈이 있지만, 현재 9개의 탈만 탈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한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선비인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됐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원은 조선 건국 후 약 150년이 지난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상도 영주군 순흥면이 고려 말 중국에서 성리학을 수입한 안향의 고향인 것을 알고 안향을 모신 사당 회헌사를 세운 것이 최초다. 이듬해에는 사당에 유생들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을 세웠는데, 불과 4~5년 만에 백운동 서원 출신 과거급제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퇴계는 금세 늘어난 학생들의 기숙사 농운정사를 짓고, 샘도 새로 파는 등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했는데, 서당을 짓고 난 이듬해인 1561년 11월 기쁜 심정을 도산잡영에 자세히 기록했다. 퇴계는 마당 한구석에 작은 연못을 파서 꽃을 심고 정우당이라 하고, 그 아래에 몽천이란 샘을 팠으며, 계곡 건너편에는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 몇 그루를 심고 ‘절우사’라고 불렀다. 절우사란 계절마다 선비들의 친구가 되는 꽃과 나무들을 말한다.

 

아름다운 야경, 월영교

700리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안동댐 보조호수를 가로지르는 월영교는 폭 3.6m, 길이 387m의 인도교로 바닥과 난간을 목재로 만들었다. 2003년 준공 당시 한국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로 기록됐다. 다리 중앙에는 ‘월영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포토존이다.

월영교는 낮에도 멋있지만, 밤에는 황홀할 정도로 더 아름답다. 다리를 중심으로 안동호반 일대가 빛으로 반짝인다. 특히 다리 건너 안동댐까지 이어지는 나들이길 가로등 불빛과 조명을 받은 객사의 풍경은 초행인 방문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월영교에서 법흥교까지 2,080m에 이르는 ‘호반나들이길’은 2013년 11월 준공됐는데 힐링이 절로 되는 산책로다. 이 산책길에는 총 8개의 전망대와 2개의 정자가 있어 쉼터와 포토존이 되고 있다. 특히 3~10월 일몰 후엔 밤 12시까지 가로등이 설치돼 운치 있는 야경을 선물한다.

월영교는 지난 4월 4일부터 오는 11월 7일까지 주말에는 하루 세 차례(오후 12시 30분, 6시 30분, 8시 30분) 월영교 분수가 20분씩 가동된다. 이를 참고해서 점심, 저녁 식사시간을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학문하는 집안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임청각’

임청각은 초대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집이다. 임청각의 주인들은 벼슬하기보다는 학문에 힘썼던 사람들이다. 벼슬한 이는 500년 동안 한 사람뿐이지만 이들은 대대로 영남 유림의 학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이 때문에 안동에서 임청각은 학문하는 집안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토착 양반들로 구성된 자치기구로 향리의 악폐를 막고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던 유향좌수와 도산서원의 원장 격인 도산서원 전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이 바로 임청각이다.

지금 임청각은 1942년에 개통된 집 앞을 지나가는 철도 때문에 50채나 되는 행랑채를 잃어버렸지만 남은 규모만으로도 가장 규모가 큰 반가다. 집의 구조도 독특해서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가구식 구조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경사지에 배치한 탓에 행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마당이 비좁고 폐쇄적이며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누정인 군자정이 횡으로 펼쳐져 그 웅장한 규모가 더 강조돼 보인다.

서까래도 위 서까래와 아래 서까래가 주먹장이음으로 이어져 있다. 전하는 얘기로는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대문이 낙동강가에 닿아 있었고, 대문을 2층 누각으로 지어 거기서 낙동강에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하지만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가문도 같이 기울었다.

가문의 모든 것을 팔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상룡은 1896년 가야산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나라가 망하자 과감하게 사당에 모셔 놓았던 조상의 위패를 땅에 파묻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너희들은 이제 독립군이다”라고 선언하며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정리해 서간도로 식솔을 이끌고 떠났다. 당대에 대한 책임을 가장 통렬히 인식하고 삼정승이 나온다는 길지를 풍찬노숙의 가시밭길로 만든 사람, 그 사람이 살았던 집이 임청각이다.



구석구석 물감옷을 입은 ‘신세동 벽화마을’

신세동 동부초등학교와 성진골 일대에 형성된 벽화마을은 2009년 마을미술프로젝트를 통해 안동대 미대 학생들이 동네 구석구석 골목에 벽화를 그리면서 생겨났다. 동네의 구석구석이 물감 옷을 입었다. 삭막하고 투박해 보이는 시멘트 벽면에 진달래와 국화, 나팔꽃 등을 그려 넣어 마치 꽃밭에 온 것처럼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인기가 많아지며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성진골을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른 언덕길로 다닥다닥 집들이 붙은 달동네였는데, 안동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벽에 그려지면서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특히 이 동네에 사는 할머니와 손자, 손녀 등의 모습이 담겨 있는 ‘일상’이란 작품은 벽화마을로 가는 입구에서 사람들을 반겼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배달원 벽화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흥미가 있다. 산동네 골목을 따라 손수레에 연탄을 배달하는 남자 벽화에는 손수레 뒤를 미는 흉내를 내며 사진 찍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스파이더맨이 담벼락을 따라 내려오고 동네 아이들이 말뚝박기를 하며 뛰어노는 등 몇 가지 벽화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실제 이곳에 사는 주민의 얼굴을 그려 넣어 이곳만의 특징을 살리기도 했다. 특히 서로 밀고 당기며 연탄을 끌어올리는 벽화는 오르막길에 그려져 생동감이 넘친다. 그동안 안동의 유교와 불교, 민속 문화재를 구경하느라 바빴다면 가볍게 산책하며 여유를 부려볼 수 있는 곳이다.



달짝지근 매운 양념이 일품인 ‘안동잉어찜’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한 말이 된 지 오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필자에겐 성경 구절이나 다름없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언제나 그 지역의 ‘맛’이다. 맛을 빼놓고서는 여행을 논할 수 없다. 여독에 지친 필자에게 힘을 실어줄 것은 다름 아닌 ‘안동잉어찜’이다. 다른 블로그에서 먼저 찾아보니 ‘삼키기도 전에 혀끝에서 녹는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필자의 혀가 증명할 터였다.

안동에는 관광명소도 많지만, 맛집도 많다. 안동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헛제사밥, 안동찜닭, 버버리찰떡이 안동을 대표할 만한 먹거리라고 한다. 하지만 안동에서 대대로 살아온 현지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안동잉어찜’이 빠져 있다고 한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어디 내로라할 생선찜을 먹어봤어도 이 맛을 따라올 잉어찜은 아직까진 없다고 한다. 외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공통된 정보 말고, 그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산 사람이 전하는 정보야말로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인 안동잉어찜이 나오기 전에, 갖가지 반찬들이 나온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젓가락질은 분주하기만 하다. 본격적으로 잉어찜이 나오자 새빨간 양념으로 인해 눈으로 맵고 칼칼한 맛을 먼저 맛볼 수 있었다. 달짝지근하고 매운 양념은 잉어와 어울려 환상의 맛을 자아냈다.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밥도둑이 따로 없는 ‘안동간고등어’

바다 없는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유명해진 이유는 고등어를 잡아서 옮기는 데 안동에 오면 다 상해버려서 영덕 강구항에서 염장을 하고 안동에서 또 염장을 해서 안동간고등어를 팔았다고 한다. 그 후로 고등어가 숙성이 되고 쫀득해져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안동간고등어는 주문하면 타지에서도 받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먹는 안동간고등어와 현지에서 먹는 안동간고등어는 분명 차이가 있을 터였다.

안동간고등어는 필자의 입속으로 쏙쏙 잘만 들어갔다. 흰 쌀밥에 짭조름한 고등어 살을 한 첩 올려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정확한 맛을 느끼고 싶다면 빨리 먹기보단 천천히 꼭꼭 씹어먹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안동간고등어는 지난 2010년 단일품목으로는 전국 최초로 위해요소중점관리(HACCP)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 전통 염장비법을 전승하기 위해 자체 개발한 생산공정 등이 소비자들이 마음 놓고 먹어도 위생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다.

또한, ‘한식대첩3’에서 경상북도팀이 ‘안동간고등어’를 선보이며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날 경북팀은 1위를 하지 못하면 끝장전에 가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비장의 간고등어찜 요리를 선보이며 상황을 역전시키기도 했다. 역시 맛있는 음식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없는 것 같다.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를 저술한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각 모든 시도가 박물관이겠지만, 안동은 콕 집어 말하자면, 이곳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