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_left
search

 

 

ȭ
ȭ

동학혁명의 살아있는 교과서 ‘정읍’

동학농민혁명관, 김동수 가옥, 옥정호 볼거리 가득

남유진 기자  / 2015-05-14 17:18:00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아이들과 어디를 떠날까 고민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 몸도 마음도 쉬고, 거기에 교육까지 더하면 일석삼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정읍은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만 있는 게 아니다. 농민들의 혁명의 불꽃이 처음 타올랐던 곳이 정읍이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정읍’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담긴 거센 저항의 불길

정읍(井邑)은 땅을 한 자만 파도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지하수가 넉넉해 고을 이름에 우물 정자가 들어갔다고 한다.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오는 길목 커다란 입간판엔 단풍 가득한 내장산 풍경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 제일의 가을 경치를 자랑하는 내장산은 정읍의 자랑이자 상징이다.

하지만 정읍은 아릿한 정감의 땅만은 아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봉준 공원, 녹두장군 옛집 등 이곳저곳에 갑오농민전쟁의 현장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담긴 거센 저항의 불길을 일으킨 호남인의 꼿꼿한 배알을 선연히 느낄 수 있다.



농민들의 피와 눈물이 담긴 ‘동학농민혁명관’

‘동학’, 학창시절 교과서로 접한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였다. 동학에 대해 많이 들어는 봤지만, 정확하게 설명을 하라고 하면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이다. 19세기 후반 안동김씨, 풍양조씨로 이어지는 세도 정치가 이어지면서 중앙정치 기강의 문란을 가져왔고, 탐관오리의 득세를 가져왔으며 그로 인해 사회는 동요했다. 지방관들은 농촌사회를 파탄시켰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거지가 돼 굶어 죽는 자가 속출했다.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졌으며 이런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인의식이 싹트게 됐다.

동학은 경주 출신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860년 천주교에 대립해 창시한 민족 종교다. 동학은 봉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유교적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백성들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혁명의 기치를 드높였다. 

2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이 자리에서 어둠을 밝힌 횃불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농민들의 부르짖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가만히 필자가 딛고 있는 땅을 쓸어보면 이 안에 농민들이 흘렸던 피와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과거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현재와의 연결고리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관’을 와보면 그들의 역사가 낱낱이 기록돼 있다. 과거, 현재에 걸쳐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부르짖음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우리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대판 1% 상류층 ‘김동수 가옥’

가끔 뉴스를 통해 듣게 되는 ‘강남 땅 부자’ 이야기는 어느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렇듯 현실과는 괴리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만의 일은 아닌가 보다. 백성들이 수탈 당하고 배곯아 굶어 죽던 시절, 김동수의 6대조 김명관이 살던 집은 아흔 아홉 칸 집으로 전형적인 상류층의 가옥이었다.

지금도 그 크기와 방 개수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조선시대 ‘김동수 가옥’을 소문으로만 듣던 백성들은 얼마나 놀라웠을까 싶다. 그리고 그와 비교되는 자신들의 초라한 삶에 얼마나 비참함을 느꼈을까 싶으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아리기까지 하다.

이 고가의 앞에는 동진강의 상류가 서남으로 흐르고 있고, 뒷편에는 해발 150여m의 창하산이 둘러 있어 풍수지리에서 명당이라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터전에 세운 주택이다. 건물은 행랑채, 사랑채, 안행랑채, 안채, 별당으로 구성돼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과 바깥행랑채가 있고 바깥행랑의 동남쪽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다. 사랑채 서쪽으로 ㄷ자형의 안행랑채를 배치했는데 그 앞쪽으로 ㄷ자 평면을 가진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우 대칭을 이루게 지어 좌우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는 특이한 평면을 갖추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 있는 안사랑채는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일꾼들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소박한 구조로 돼 있으나 건립자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고, 후세에 보수되거나 개조되지 않고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어 조선조 양반들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민속자료가 되고 있다.






하루 24번 아름다운 옥정호

섬진강댐의 근처에 옥정리(玉井里)가 있다. 조선중기에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머지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해 옥정호라 했다고 한다. 옥정호의 물을 담수하고 있는 댐은 섬진강댐이며, 댐의 지류는 좌안(左岸)이 임실군 강진면, 우안(右岸)이 정읍시 산내면이다.

옥정호는 4계절 내 아름다운 호수다. 새벽, 아침, 오후, 노을 지는 저녁 할 것 없이 아름다워 이를 보고 누릴 수 있는 정읍민들은 축복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멀리서 보면 하늘이 물 위에 그대로 담겨, 두 개의 같은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술 취한 이백이 강물 위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죽었다는 전설도 옥정호의 절경을 보면 일견 수긍이 가는 말이다. 

옥정호 전체로 보면 여러 번 굽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형태의 호수며, 전체 면적은 768㎢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고 주위의 자연환경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자연의 비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행의 백미는 ‘사진’이라고 하던데 필자는 옥정호를 배경 삼아 많은 사진을 찍었다. 햇빛과 호수의 빛반사면만 달리 해도 전혀 다른 사진이 되니 이 또한 여행의 선물 아니겠는가. 나중에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러 이곳에 방문해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다. 풍광은 그대로인데 필자의 얼굴만 좀 늙수그레해지니 말이다.


 

남유진 기자 (0166430410@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