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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강남의 수향마을 절강성 견문록②

김종원 공학박사·여행 칼럼니스트  / 2013-09-04 10:28:57

백사 백소정과 선비 허선의 사랑 이야기가 깃든 뇌봉탑

뇌봉탑(雷峯塔·레이펑타)은 서호 남쪽의 남병산(南屛山·난핑산) 기슭에 있는 탑으로 북송 때인 977년 오월의 왕 전홍숙의 총애를 받던 비 황씨가 득남한 것을 경축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원래의 탑은 벽돌과 목재를 병용한 전목탑으로 8각형의 누각식 5층으로 건립됐으나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때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서 탑신만 남게 됐고 그 뒤 사람들이 이 탑의 기초석을 자기 집에 가져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한 개 두 개 빼가는 바람에 1924년 9월에 완전히 붕괴됐다. 무너진 뇌봉탑 안에서는 옛날 스님들이 사용했던 여러 물품과 사리 등 많은 보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 80여 년 동안 유적지로만 남아 있다가 2000년 12월 복원공사에 착수해 2002년 10월에 71.96m 높이의 탑을 완공했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현대식 시설을 갖추는 바람에 현대적인 냄새가 풍겨 1,000년의 역사는 느껴지지가 않는다.

또한 뇌봉탑은 백사전(白蛇傳)으로 유명한 백사(白蛇)의 전설로 널리 알려지게 된 탑이기도 하다. 전설의 줄거리는, 한 마리의 백사가 인간세상을 동경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한 후 허선이란 총각을 만나 단교(斷橋)에서 사랑을 나누고 결국 임신까지 하게 돼 아기를 낳는다. 그러나 요괴(妖怪)와 인간의 결합을 용납하지 않았던 법해(法海)스님이 허선이란 총각을 금산사로 데려가 가두었다. 그러나 백사가 요술을 부려 허선을 빼내가자 이번에는 스님이 백사를 잡아 뇌봉탑 아래에 가두고 “백사는 서호 물이 마르고 뇌봉탑이 무너지기 전에는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후 1,000년의 세월이 흐른 1924년 서호 물이 거의 마르다시피 할 때 뇌봉탑이 무너졌는데, 이를 두고 중국 사람들은 백사와 허선 둘의 사랑의 힘에 의해 무너진 것이라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 옛터가 전시되고 있는 1층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원탑의 잔재가 남아있다. 유리칸막이 안에는 지폐와 동전이 가득하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단으로 가면 서호가 한눈에 조망된다. 고즈넉하고 무척이나 아름다운 서호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서호가 인공호수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연호수이다. 당나라 중반 때의 인물인 백거이가 무너진 제방이 농사를 망치는 것을 보고 제방공사를 다시 했으며, 2백년 후 송나라 초기에 소동파가 가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이 웃자란 수초들 때문에 물대기가 힘들게 되자 호수 바닥에 침전된 진흙을 모두 파내게 했는데 이때 제방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원래 자연호수인 것을 백거이, 소동파 등이 다시 작업을 해서 제방을 쌓았을 뿐 인공호수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중국에는 서호란 이름을 가진 호수가 무려 80여개가 있을 정도로 많지만 이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항주의 서호이며, 일반적으로 서호하면 항주 서호를 말한다. 다른 지역의 서호를 말할 때는 반드시 서호 앞에 지명을 붙여야 한다. 예로 양주(揚州·양저우) 서호, 무석(無石·우시) 서호 이런 식으로 말이다. 뇌봉탑 천정 중앙에는 금색의 연꽃과 주변에 수많은 불상이 부조돼 있다. 걸어 내려오면서 각층마다 걸려있는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재신(財神)이라 불리는 호설암과 그의 고택

‘중국 거상의 제일저택’이라 일컫는 호설암 고택(故居)은 항주시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거리인 하방가(河坊街·허팡지에)와 대정항(大井巷)역사문화보호구 동쪽 원보가(元寶街·위엔빠오지에)에 위치해 있다. 호설암(胡雪岩·후쉐엔·1823~1885)은 19세기 말 중국 청나라를 대표하는 거상으로 현재까지도 중국인들 사이에 ‘살아서는 활 재신(活財神) 죽어서는 상 재신(商財神)’이라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호설암은 1823년 안휘성(安徽省·안후이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광용(光墉)이고 자가 설암(雪岩)이다. 집안이 워낙 가난해서 따로 공부할 수 없었던 그는 아버지한테서 읽고 쓰는 정도만 배웠다고 한다. 12세 무렵 아버지가 죽은 후, 호설암은 고향을 떠나 절강성 항주에 있는 신호전장에 수습사환으로 들어갔다. 전장(錢莊)은 중국 남부에서 자생적으로 발달한 사설금융기관을 말하는데, 이 전장은 차츰 근대적 은행으로 발전하는 토석이 된다.

호설암이 일개 수습사환으로부터 시작해 중국 최초로 상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청나라 정부로부터 붉은 산호가 박힌 모자를 하사받은 사람이다. 이때부터 호설암을 ‘홍정상인(紅頂商人·홍딩샹렌)’이라 불리게 된다. 오늘날에는 홍정상인이 ‘붉은(공산당) 우두머리 상인’이란 뜻으로 기업에 몸담고 비즈니스 활동을 하는 당 또는 정부의 고급관리를 지칭하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청대 당시에는 1급 관직에 해당했다. 사실 호설암의 부의 축적과정을 보면 오늘날의 경제윤리나 기업윤리로 볼 때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는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며 새방파(塞防派)의 우두머리인 좌종당(左宗棠)에게 돈줄을 대고 관과의 유착을 통해서 부를 쌓았기 때문에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를 관상상인(官商商人·관과 결탁한 상인)이라고도 부른다.

호설암은 그의 나이 51살 때인 1874년 5월, 호경여당(胡慶餘堂·위칭위탕)이란 약방을 개점했는데 이날 ‘戒欺(계기)’라고 적힌 현판을 내걸었다고 한다. 계기는 말 그대로 ‘거짓을 경계한다.’ 즉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재료를 선별하고 구매함에 있어 진품만을 고집할 것이며 약을 제조할 때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정성껏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실제 그는 약재의 조제 과정을 직접 감독해 한결같이 좋은 품질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런 신의로 인해 호경여당은 좋은 품질의 약과 빈민구제 등으로 명성을 얻으며 급속도로 전국각지로 점포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호설암의 파산 이후에도 호경여당은 살아남아 호설암이 일으킨 사업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호설암은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핵심 요소를 마음에 새기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첫째, 큰 사업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인 ‘입지(立志)’
둘째, 사물의 큰 흐름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인 ‘안목(眼目)’
셋째, 사업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수활(手滑)’
넷째, 사업의 뜻을 세우는 것은 나(我)지만 성공시키는 것은 남(他)이라는 ‘용인(用人)’이 그것이다.    

신의를 바탕으로 돈을 버는 데에 있어 일정한 원칙을 지켰던 호설암은 사업을 함에 있어서는 큰 것을 추구했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성실과 배움 그리고 인맥관리를 중시했으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안일하게 지내는 사람에게는 크고 높은 뜻이 생길 수 없다. 큰 뜻을 가지고 큰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마와 수련이 선행돼야 한다. 눈은 먼 곳에 두되 가까이에 있는 인연에 충실하다 보면 장차 드넓은 천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작은 상인은 재물을 탐하고, 큰 상인은 인재를 탐한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돈을 모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인재를 얻는 것이라 했다.

일찍이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루쉰)이 말한, “호설암이야 말로 봉건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다.”란 말을 가슴에 담으며 호설암 고택으로 들어섰다. 중앙에는 청나라 동치(同治)황제가 내렸다는 면선성영(勉善成榮) 현판이 자리하고 있다. 면선성영은 ‘착한 일에 힘쓰면 영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진정한 영화를 누리지 못하다.’는 말이겠다. 면선성영 좌측에는 ‘어진 바람을 일으켜 백성들을 위로 한다.’는 뜻인 봉양인풍(奉揚仁風) 현판이 그리고 우측에는 ‘하늘을 공경해 받들면 은혜를 받는다.’는 승천은사(承天恩賜) 현판이 그리고 그 옆에는 ‘장사를 하는데 있어서도 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인 경상유도(經商有道)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오른쪽 기둥에는 ‘집안에 전하는 도(道)가 있으면 오로지 두터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인 傳家有道惟存厚(전가유도유존후)가 쓰여 있고, 왼쪽 기둥에는 ‘처세란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니 다만 솔직 담백해야 한다.’는 뜻인 處世無奇但率眞(처세무기단솔진) 글이 세로로 쓰여 있다. 은행나무로 지었다는 문루(門樓)에는 ‘닦은 덕은 높이 걸어두어 멀리 퍼져나가게 해야 한다.’는 뜻인 脩德延懸(수덕연현) 현판이 있고 문루에 섬세하게 조각한 부조는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여기에서 문루란 대궐이나 성 따위의 문 위에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지은 집을 말한다.

안뜰로 들어서면 잉어 떼가 유영하는 연못이 있는데 태호석으로 꾸며졌다. 연못 정면의 석교 너머에는 청우정(晴雨亭)이 있고 왼쪽에는 예금당(藝錦堂)이 아름다움과 위용을 동시에 뽐내고 있다. 12명의 아내들이 기거했다는 청아당(淸雅堂) 2층 침실 창문 또한 아름답다.

내부 이곳저곳을 두루 살펴보았다. 한약을 달이던 부엌에는 큰 솥 1개, 중간 솥 2개, 작은 솥 4개 모두 7개의 솥이 있고, 부엌 중앙에는 조왕신(·王神)을 모셨다. 조왕신은 부엌의 길흉화복을 맡아보는 신으로, 필자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새벽에 일어나 공동우물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와 조왕신에게 바친 후 손을 비벼가며 뭔가 열심히 빌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약방이 있어 실제 약을 판매하고 있으며 마당에는 조각돌로 무엇인가를 형상화 해놓았다.



항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하방가


호설암에서 나와 하방가(河防街·허팡지에)로 갔다. 하방가는 항주의 역사문화거리인 청하방(淸河坊·칭허팡) 역사문화경구(曆史文化景區) 내의 중산중로(中山中路) 주변에 있는 거리 중 한곳으로 청나라 시대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청하방은 항주가 남송시대의 도읍이었을 때부터 가장 번화했던 거리로 이곳에서는 중국의 다양한 민속 문화와 분주히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하방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푸른색 기와의 호경여당(湖慶余堂·후칭위탕)이다. 담장의 높이가 물경 12m에 이르고 길이도 60m에 달한다. 또한 하방가의 한쪽에 위치한 흰색의 벽에는 ‘호경여당국약호(胡慶餘堂國藥號·후칭위탕궈야오하오)’라는 검은색의 일곱 글자가 횡(橫)으로 쓰여 있는데, 각 글자의 크기는 높이 5m, 폭 4m이다. 그러나 상점에 가려 글자의 하단부는 가려있다.

하방가의 풍물 이모저모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양옆 건물 중앙에는 물이 흐르고 덮개가 있는 수로위에는 의자가 놓여 있어 나이든 분들이 다리쉼을 하고 있다. 작품명은 알 수 없으나 담에는 출입문과 창문, 실제 사용했던 자전거, 두꺼비집, 2층 계단, 공구보관함, 가스통위에 주전자, 수도꼭지가 있는 세면대 등을 입체적으로 붙여 놨다. 여러 풍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상인이 직접 가져온 민물조개에서 진주를 추출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녹차를 직접 덖어 판매하는 상점에 있는 커다란 주전자,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는 유령의 집인 괴택(怪宅·귀신집), 누에고치에서 실크를 뽑아 늘여서 이불을 만드는 장면, 장소천 가위(張小泉剪刀) 판매장 그리고 납양편(拉洋片·라양피앤) 등이다.



항주는 비단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전통가위로도 유명하다. 특히 장소천 가위는 300여년 된 가위전문 메이커로서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며 중국정부로부터 명품으로 지정받았다. 값도 비교적 저렴해 3개를 구입했다. 그리고 필자가 가장 눈여겨 본 것은 어렸을 때 경험했던 ‘납양편(拉洋片·라양피앤)’이다. 납양편을 우리는 ‘요지경(瑤池鏡)’이라고 하며, ‘줄을 당기는 서양식 극’으로 청나라 말기에 주로 길거리에서 유행했던 민간예술의 하나이다. 납양편은 확대경이 달린 조그만 구멍을 통해 그 속의 여러 가지 그림을 돌리면서 들여다보는 장치인데, 변사(辯士·무성 영화를 상영할 때 그 줄거리나 대화 내용을 설명하던 사람)가 한 단락 얘기할 때마다 상황에 맞는 슬라이드로 바꿔준다. 내용은 주로 중국의 설화와 전설 등을 담고 있다. 이번에는 무송(武松)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이야기다. 무송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인물로 양산박의 108 두령 중 한 명이다. 무송은 친형 무대(武大)가 불륜의 관계였던 형수 반금련과 서문경에 의해 죽자 그 둘을 죽이고 자수한 뒤 맹주로 귀양간 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육화사에서 출가해 남은 삶을 스님으로 살았다는 인물이다. 상자 안의 그림과 함께 변사의 구수한 입담이 재미를 더해주며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낡은 납양편 위의 해학적인 그림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매우 뛰어난 솜씨를 연출하는 요지경은 신기하도다.’란 뜻인 ‘絶技之表演(절기지표연)·神奇拉大片(신기납대편)’과 ‘盡在一眼(진재일안)·千古妙趣(천고묘취)’라 쓴 대구(對句·표현이 비슷한 어구를 나란히 써놓은 글귀)는 옛 정취와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