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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트래블 | 북인도 배낭여행기10

힌두교 푸자(Puja) 의식과 갠지스 단상(斷想)

김종원 객원기자  newsone@newsone.co.kr / 2012-09-03 14:17:32

브라만 사제가 주관하는 푸자 의식
강가(Ganga·갠지스 강)의 가트를 거닐다가 호텔로 들어와 잠시 쉰 후 어둠이 깔리자 다샤스와메드 가트로 갔다. 푸자 의식을 보기 위해서이다. ‘푸자(puja)’란 공양(供養)을 뜻하며 힌두교의 숭배의식으로 힌두교 인이 신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매일 행하는 의식이다. 신들의 천국, 종교의 나라 인도에서 푸자란 알파(Α)와 오메가(Ω), 즉 인도인의 삶의 시작과 끝으로 힌두교 인의 일상생활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다샤스와메드 가트에서는 매일 해질녘부터 젊은 푸자리(Pujari·푸자 의식을 거행하는 브라만사제)에 의해 1시간정도 의식이 거행된다. 강가에는 휘영청 둥근달이 떠있고 어둠이 스며든 강가에 횃불이 밝혀지면 브라만 사제들이 벌이는 푸자 의식을 보기 위해 수많은 여행객들이 현지인들 속에 섞여 신기해하며 지켜보고 있다. 브라만 사제들은 생김새부터가 서구적이고 귀티가 난다. 푸자리가 향로에 향을 피우고 손 종(鐘)을 치며 몸짓으로 강가의 신을 부르는 동안 한쪽에서는 청재킷을 입은 젊은이가 작은 풍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한다. 푸자 의식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서 행해지는 푸자 의식이 여행객들에겐 신비한 볼거리에 불과할지 몰라도 힌두교가 대다수인 인도인들은 매우 경건하고 진지한 가운데 진행된다. 푸자 의식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강가로 내려와 소원을 빌며 디아(강가에 띄우는 촛불)를 띄워 보낸다. 캄캄한 강가는 물위를 떠다니는 디아들로 장관을 이룬다. 흩어졌던 대원들과 다시 만나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윤영조 대원이 된장국을 끓이고 내가 마지막 남은 배추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여 옥상으로 올라갔다. 캘커타에 있는 마더 데레사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헤어져야 할 승기군, 수현, 연주양과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맥주를 곁들인 식사와 함께 격려의 말과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밤 열시 반이 넘었는데도 강가에서 화장은 계속되고 있다.간밤에도 잠을 설쳤다. 옆방에서 우리나라 여대생들이 몇 명의 남학생들과 술판을 벌여 새벽까지 크게 떠들고 얘기하는 바람에 자다가 깨기를 반복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쾅쾅 여닫는 문소리와 특히 여대생들의 목소리는 싸우는 것처럼 들린다. 나도 잠 좀 자자고 몇 번을 얘기하려다가 참았는데 다른 옆방에 있던 사람이 벽을 치며 큰소리로 조용히 하라는데도 막무가내다. 도대체 부모들이 자식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받았기에 이렇게까지 안하무인(眼下無人)일 수 있단 말인가? 대학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조금 못사는 나라라고 업신여기고 옆 사람에게 피해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자기 밖에 모르니 원, 참으로 한심스런 족속들이다.



무질서와 혼돈의 강가 풍경
다음 날 아침 일찍 겨우 고양이 세수만 하였다. 수돗물에서 냄새가 나고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수를 했다고는 하지만 화장터가 있는 강가(갠지스 강) 하류물이다. 강가 상류 물에는 대장균이 1리터 당 500만 마리, 강가 하류 물에는 2,700만 마리가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양치질은 구입한 생수로 하였다. 일출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옥상 위로 갔으나 구름이 끼어 기다렸다가 해가 중간쯤 올라왔을 때에야 촬영하였다. 원래 계획은 배를 한 척 빌려 강가를 유람하면서 일출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는데 며칠 전 이곳 강가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해 경찰당국에서 배를 띄우지 못하게 일렬로 묶어두는 바람에 배를 타지 못했다. 화장터가 있는 강가로 갔다. 강가 주변에는 화장에 쓰일 장작더미가 산을 이루고, 시신을 더 잘 타게 하고 냄새가 안 나게 만든다는 향과 점화용 불씨도 있다. 점화용 불씨를 아그니(Agni)라고 한다. 아그니는 인도의 베다(Veda)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으로 암흑을 물리치고 부정을 태워 없애며, 장례나 제사를 지낼 때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로서 죽은 자의 수호신(守護神)을 일컫는다.
강물 안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차가운 물에 세수하고 목욕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화장터에서 시신을 태운 재와 다 타지 않은 시신의 일부를 그대로 흘려보낸 물에서 이빨 닦고, 세수하고, 목욕하고, 빨래하고 심지어 성수라 하여 병에 담아 집에까지 가져간다. 이방인의 눈에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곳 강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화장장인 도비가 더 가까이 와서 보라며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따가운 눈을 비벼가며 1m 앞 가까이 근접하여 시신이 장작불 위에서 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배 부위가 먼저 타고 머리와 다리는 타지 않고 그대로인 시신도 목격할 수 있었다. 머리가 멍하다. 마치 백치가 된 기분이다. 장작 위에 올려 타고 있는 시신을 보고 있자니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과연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며 부활의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마치 무질서와 혼돈(混沌)의 세계에 빠져든 느낌이다. 빨간 천과 노란 천에 덮인 시신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빨간 천은 여자 시신 노란 천은 남자 시신이다. 그중에는 임산부와 어린 아이도 있다. 어린이 시신은 석판(石板) 위에 흰 천으로 둘둘 말아 코코넛 줄로 꽁꽁 묶었다. 자그마한 발가락이 보이는데 안쓰럽기 그지없다. 표 동무는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만다. 아이의 젊은 아빠는 망연자실한 채 고개를 푹 숙인 채 슬픔에 잠겨 있다. 도비가 석판과 함께 아이를 들어 배꼽 부위에 물이 찰 때까지 강물로 들어가 강물에 시신을 던짐으로써 수장 절차는 끝이 났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임산부와 어린이는 화장을 하지 않고 강에 던져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오랜 풍습이 있다. 석판은 물에 쉽게 가라앉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에로틱 조각으로 유명한 네팔사원
누군가가 다가와 사진을 찍고 싶으냐고 묻는다. 아마 이곳 도비의 우두머리인 것 같다. 그렇다고 했더니만 1,000루피를 달라고 한다. 돈이 없다고 하자 카드도 된다고 한다. 이 녀석,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한다. 흥정에 들어갔다. 100루피 밖에 없다며 호주머니까지 뒤집어 보였다. 밀고 당기는 흥정 끝에 100루피가 아니면 사진을 찍지 않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10여 발짝을 옮기니까 나를 불러 세웠다. 결국 100루피에 5컷을 찍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반인들 같으면 도저히 촬영할 수 없는 희귀한 사진 5장을 찍을 수 있었다. 이렇게도 리얼한 화장 장면 사진을 인도배낭여행 네 번째 만에 찍었다. 동영상을 촬영하려면 돈을 더 달라고 해 포기해 버렸다. 이곳에서의 화장 장면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화장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만약에 모르게 촬영하다 걸리면 카메라를 빼앗아 강물에 던져버린다고 한다.          
화장터에서 나와 표 동무와 함께 강가의 직사각형 석판이 있는 빨래터에서 빨래 감을 내리치며 빨래를 하는 도비왈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가트를 걸었다. 남자는 팬티만 입은 채, 여자는 사리를 걸친 모습 그대로 강물로 들어가 머리까지 물에 담갔다가 나온다. 온 몸에 비누칠을 하며 목욕하는 사람, 발뒤꿈치에 있는 때를 벗겨내는 사람, 안마를 하는 사람, 강가 신에게 바칠 꽃을 파는 여인, 사두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는 제자, 소똥을 말리는 노인, 가트 계단에 일렬로 줄지어 앉아 구걸하는 사람들로 즐비하다. 가장 인도다운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강가가 아닌가 싶다.
가트에 있는 네팔사원에 들렸다. 입장료는 10루피이다. 이 네팔사원은 남녀 교합을 목각에 새긴 에로틱 사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처마 중간 세로로 놓인 에로틱 조각과 문짝과 문틀에 새긴 무수한 종과 사람모양의 부조 그리고 타종(打鐘) 부위에 새긴 문양과 부조를 눈여겨보면 참으로 흥미롭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오는데 골목에 이제 막 도착한 시신 한 구가 오토릭샤 지붕위에 얹혀 있다. 화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다음은 석류정 선교사가 강가를 거닐며 묵상한 내용을 ‘갠지스 단상’이라 제목을 붙인 글이다.

갠지스 단상(斷想)
갠지스, 죽음보다 더 깊이 흐르는 강, 삶보다 죽음이 더 많은 곳,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고 죽은 사람은 다시 태어나는 곳, 그러나 통곡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쉼 없이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하루의 태양이 푸자의 종소리와 함께 저물어 가면 어제의 별은 또 다시 살아 오른다. 그 별빛을 머금고 여울지는 강 아래엔 내가 보았던 작은 아이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을 거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의 죽음을 만났다. 커튼만 젖혀도 쉽게 모든 의식을 볼 수 있는 숙소에서 노란 천으로 덥힌 하나의 주검을 보는 순간, 내가 보았던 숱한 죽음과 또 다른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았다. 시신을 덮은 노란 천은 여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여자는 배가 불러있었다. 나일론 천의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왔는데 제법 높이가 있었다. 보다 가까이 보고 싶었다. 신발 뒤축을 심하게 계단에 부딪히며 내려갔다. 어린 아이의 주검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임신한 여자의 주검도 이미 몇 번 보았다. 시신의 크기 만 한 반듯한 돌 위에 시신을 놓고 코코넛 밧줄로 단단하게 묶은 다음 망자의 상주가 직접 강으로 던진다. 그리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서서 그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다 알고 있는 의식의 순서였지만 아무리 보아도 여전히 숙연해지는 것은 삶과 죽음이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일까? 대나무 들것에 실려 온 여자, 무엇으로 인해 세상을 저렇듯 일찍 하직했는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나의 가슴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인연이다. 수만리 먼 나라에서 온 사내와 낯선 조우, 지금은 서로 다른 이승을 지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 또한 무의식의 몸으로 산자들의 의식 속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내 비록 살아서 저토록 깊은 잠에 시선을 모으고 있지만 말이다.



정월의 차가운 바람 가운데 서서 얇은 하얀 천 하나로 몸을 감싼 사람은 의외로 젊었다. 차마 하고 싶지 않은 듯 자꾸만 의식된 행동을 멈추려했다. 갠지스 강물에 세신을 하는 첫 번째 의식에서도 그는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의식을 이끄는 사람은 재촉을 한다. 할 수 없이 강물에 세 번 시신을 담그더니 이내 준비된 두껍고 평평한 돌 위에 시신을 뉘어 놓고 줄로 여러 번 감았다. 그렇게 돌에 매단 시신을 태운 작은 나룻배는 상주와 몇 사람만 태운 채 강 가운데로 천천히 노를 저어가고 이윽고 강 한 가운데 쯤 온 것을 확인하자 더 이상 생각할 이유도 없다는 듯이 강 속으로 던져졌다. 마치 귀찮은 물건을 내 버리듯… 이승과 저승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긴 누가 죽음의 땅을 저 먼 곳이라고 말을 하겠는가? 두 갈래 철로처럼 한쪽의 길로만 존재할 수 없듯이 삶과 죽음은 동반자임에 틀림없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은 이렇듯 가까이 있음을 부정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런 까닭일까?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이 저들의 가슴에 있는 이유일까? 강물에 시신을 던져 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서 올 수 있는 저 순한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나는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은 어떤 사내를 알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낸 심정은 인간의 그 어떤 표현으로도 다 할 수 없다고 했다. 떠난 사람을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목이 수시로 부어오르며 가슴이 쥐어짜는 통증으로 몇 해를 지내야만 했다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갠지스 강의 죽음에서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로 죽음의 의식인지 의심이 갔다. 생각의 차이라고, 사고와 의식의 차이라고 단정하지만 쉽게 마음은 추슬러지지 않는다. 그래도 죽음인데, 어디 외국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타국 먼 곳으로 시집보내는 것도 아닌데, 아주 긴 이별, 다시는 이 지상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마지막 인사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지만 정말 그랬다. 보내는 사람이 누구든, 떠난 사람이 누구든, 이곳 갠지스 강 죽음 앞에서는 통곡도 슬픔도 배어있지 않았다. 그저 시무룩하게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가끔 고개를 들어 먼 강을 바라다보았던 젊은 아비의 표정이 내가 본 슬픔의 절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우리 아들을 군에 보낼 때 조치원역에서 손을 흔들어 주던 그 정도의 표정이었을까? 하긴 그렇다. 작별의 인사일수록 짧게 하라는 말처럼 이미 사람의 형체만 두르고 있는 주검 앞에서 굳이 서럽도록 울부짖는 일이 무슨 소용 있으랴마는 하지만 그 어떤 이성과 인내로도 이별의 비통함을 참아내기는 힘든 법. 도대체 저들의 심장은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저토록 이별의 슬픔을 잘도 참아내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해가 저물고 별이 수북이 살아 오른 후에야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이십 오 촉 백열전구 불빛 아래 소리 나는 침대가 내 숙소의 전부였다. 나를 불러주는 이도, 내가 부를 이름도 없다. - 산다는 것은 외로운 거야.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이 삶이야 - 똑 같은 말을 몇 번 뇌이며 커튼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