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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트래블 | 북인도 배낭여행기⑧

고즈넉한 시골마을 오르챠(Orchha)와 에로틱 조각상으로 유명한 카주라호(Khajuraho)

글․사진│김종원 객원기자  / 2012-07-20 12:35:18

[여행=문화관광저널]매우 고즈넉한 시골마을 오르챠

미지근한 물로 샤워부터 하고 토스트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였다. 9시40분 아그라를 출발 해 오르챠로 향했다. 6시간이 넘는 여행 끝에 오후3시50분 오르챠에 도착하여 ‘Hotel Ganpati’에 여장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우리나라 장급 여관 수준만도 못한 시설이다. 호텔 입구에서는 지배인이 나와 일행들의 목에 일일이 꽃을 걸어주며 이마에 붉은 띠까(힌두교인이라는 뜻의 이마에 점을 찍는 행위)를 찍어 준다. 호텔에서 나와 2층 식당에서 탈리로 늦은 점심을 먹은 후 곧장 오르챠 성으로 갔다.

오르챠(Orchha)는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인 악바르(Akbar)에게 그의 아들 제항기르(Jehangir)가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도망쳐온 곳으로, 당시 오르챠 군주였던 비르 싱 데오(Bir Singh Deo)는 고심 끝에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3년 후 악바르 황제가 죽고 마침내 그의 아들인 제항기르가 무굴제국 제4대 황제에 오르게 되자 비르 싱 데오는 무굴제국의 비호아래 자신에게 수여된 지역들을 관장하는 중심지로 삼았다. 이곳은 아름다운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지만 찾는 사람이 적어 매우 한적하고 고즈넉한 시골이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순다르 마할(Sundar Maha)l’, ‘락쉬미 나라얀 사원(Lakshmi Narayan Temple)’ 등이 있다. 특히 ‘Dinman Hardaul′s Palace’는 형제의 부인을 탐했다는 의심에 대해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한 왕자의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자살을 통해 순결을 증명한 왕자는 이 지역의 신으로 승격되어 섬긴다고 한다.

걸어서 여러 성(城)들을 둘러보았다. 사원에는 어디를 가나 걸인들이 있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마에 노란 물감을 칠하고 목에는 꽃을 건, 사두인지 걸인인지 분간키 어려운 사람이 앉아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10루피를 기부하였다. 매표소에 사람이 없어 그냥 들어갔는데 어디에선가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나타나 원래 입장료가 한사람 당 200루피인데 한사람 당 20루피씩을 주면 자기들이 안내를 해주겠다고 한다. 성안에는 호텔이 있는데 하루 밤 숙박비가 1,500루피라 한다. 어둠이 깔리고 있어 성에서 나왔다. 시장에서 양배추와 오이를 사가지고 들어와 누룽지를 끓이고 양배추는 삶아 오이와 함께 된장에 찍어 맛있게 저녁식사로 하였다. Super Strong Beer를 두잔 마셨는데 해롱해롱해 씻지도 못한 채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강가의 악취 진동

숙소는 춥고 모기떼의 극성 때문에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호텔 주변에 모기의 서식처인 고인 물이 많아서인지 모기들이 무척 많다.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샤워부터 했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가 일출을 감상하였다. 아침식사도 할 겸 오르챠 광장으로 갔다. 광장 주변에는 많은 노숙자들이 불을 지피고 잔 흔적들이 역력하다.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눈알이 충혈 된 노부부 걸인과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도 막대과자를 나눠줬다. 원빈식당에서 감자수제비와 김치볶음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원빈식당이란 상호는 원빈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관광객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일 것이다. 아마 여학생이지 않나 싶다. 식사 중에도 모기들이 다리를 문다아침식사 후 자그마한 동네를 지나 성이 바라다 보이는 강가로 갔다. 우리가 묵은 호텔 종업원이 안내하겠다며 따라나섰다. 강가에는 빨래하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목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5년 전에 비해 강의 수량(水量)이 현격히 줄어있다. 가뭄이라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오르챠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고즈넉한 마을 풍경과 17세기의 궁전들 그리고 주변의 고성들이다. 그중에서도 강가에서 저 멀리에 있는 고성을 바라보는 것이 단연 압권이다. 오르챠의 매력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뒷짐을 지고 한가롭게 거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강가로 다가갈수록 악취가 진동한다. 사람과 동물들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싼 배설물에서 난 냄새인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발걸음을 옮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설물을 밟기 십상이다. 석 선교사는 배설물을 피해 돌과 돌 사이를 건너뛰다 발이 미끄러져 앞으로 넘어지면서 하마터면 배설물을 맛볼 뻔하였다. 자기가 특수부대 출신이기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피했지 일반군인 출신이었더라면 얼굴에 배설물로 범벅이 됐을 거라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우리를 안내한 호텔 종업원에게 수고했다며 100루피를 줬으나 받지 않는다. 자기 호텔에 온 손님이기 때문에 당연히 안내한 것이라며 말이다. 인도 서민층에 이런 사람도 있다니 참으로 신기할 정도다. 아직까지는 때가 덜 묻고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는 오르챠라는 생각이 든다.

에로틱 조각상으로 유명한 카주라호

10시 15분 오르챠를 떠나 카주라호로 향했다. 전에 이 도로를 달렸을 때는 비포장에 패인 곳이 많아 속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요철이 심해 ‘스카이 콩콩’을 타는 기분이었는데 도로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시간을 앞당겨 오후 3시경 카주라호에 도착할 수 있었다. ‘Hotel Harmony’에 여장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게스트 하우스다. 우리나라 배낭 여행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아씨식당에서 김치볶음밥과 김치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에는 저녁에 먹을 닭백숙을 예약 주문해 놓고 사이클 릭샤를 타고 동부사원군(東部寺院群)으로 갔다. 파르스바나트(Parsvanath), 산티나트(Shantinath), 아디나트(Adinath) 등 3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있는 동부사원군은 카주라호 중심지에서 가깝고 사원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자전거를 빌려 타고 둘러보는 것이 좋다. 이곳 사원에는 에로틱 조각상은 없으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부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정말이지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다. 사원 입구에는 발가벗은 채 수행 중인 자이나교 승려의 여러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다. 해질 녘에야 사원에서 나와 아씨식당으로 가서 닭백숙으로 저녁을 먹은 후 천 가게에 들려 손으로 한 올 한 올 꽃모양을 수놓은 머플러를 사가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그동안 밀린 속옷과 양말을 빨아 옥상에 널었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에는 전기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08:00시만 되면 시내의 모든 전원이 끊기고 오전 8시 ∼ 정오까지는 더운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토스트, 오믈렛, 우유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 서부사원군(西部寺院群)으로 갔다. 서부사원군은 가장 크고 카주라호 사원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사원 주변에는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은데, 성행위가 묘사된 잡지와 성행위 동작을 기하학적으로 제작한 물건 등 성(性)에 관련한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10대 어린이가 구리로 만든 기구로 성행위 하는 장면을 계속 보여주며 사라고 귀찮게 굴어 “이런 어린놈이 어르신한테 버르장머리 없이.....”라며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며 한바탕 웃었다. 입장료가 현지인은 10루피인데 외국인은 5달러 또는 250루피이다. 루피가 없어 달러로 내니 일렬번호를 확인하고 복사해 오라고 한다. 비디오를 촬영하려면 25루피를 더 내야 한다.

‘카주라호(Khajuraho)’는 한낱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은 한적한 시골이지만 에로틱한 조각들로 인해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다. 이 사원들은 1,000년 전 ‘달의 신’ 챤델라 왕국의 전성기(950∼1050년)에 세운 것으로 14세기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파괴되어 묻혀 지내오다가 19세기 영국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85개의 사원 중 22개에 지나지 않으나 이 사원들은 챤델라 왕국의 보물이자 카주라호의 보물이며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에로틱한 건축물이다.

에로틱 조각상의 의미

그럼 그들은 왜 이런 에로틱한 조각을 사원에 남겼으며 이런 조각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욕구는 식욕(食慾)이 아닌 성욕(性慾)이라고 한다. 이곳의 에로틱 조각상들은 여러 형태와 자세의 성교(性交)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수도승들이 공부를 하면서 이러한 장면을 보고도 초연할 수 있는 무심의 상태에 달했을 때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다음 내용이 더욱 정설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챤델라 왕국의 예술가들은 사랑의 모든 형태와 자세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성적 표현이 금기시 되지 않은 시기로 사랑은 남녀의 결합으로 맺어진 거룩한 황홀의 경지에 이르는 순간이라 생각했다. 또한 중세에는 자유로운 관습으로,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은 사냥만큼이나 필연적이었고, 여자는 오로지 생식력(生息力)의 대상이었으며, 당시의 사원들은 남녀 간의 사랑을 찬미하는 무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에로틱 조각들은 인도의 유명한 성(性)의 개론(槪論)인 ‘카마수트라(Kama-sutra·4세기 경, 산스크리트어로 쓴 고대 인도의 性愛에 관한 경전)’에서도 영감을 받았는데, 그 때 사랑의 기술은 의학이나 경제처럼 학교에서 습득을 했다고 한다.

또한 사랑은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생활의 기쁨 중에 하나였으며, 챤델라 시대의 남자들은 항상 전쟁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거리의 다른 여자들과도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에 성병(性病)에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이때에는 성병의 특효약인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발견되기 이전이었기에 동물과의 성행위로 성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동물과의 성행위가 조각되어 있다. 또한 챤델라 시대에는 대가족일수록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젊은 부부들은 그들의 결합이 신들의 축복을 받고 장차 훌륭한 아이들을 낳을 수 있도록 이 사원에 와서 기원을 드렸다고 한다.

즉, 이 에로틱조각들은 다산을 유도하는 하나의 매개체였으며, 이 관능적인 조각들은 카주라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 사원들은 당시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건축물 아래에는 일상적인 활동 즉, 사냥, 전쟁, 사랑과 출산을 볼 수 있으며, 사원 건축물의 위로 올라 갈수록 교권과 신성에 가까워진다. 근자에 밝혀진 또 하나의 이론에 의하면 사후세계(死後世界·중음기간·사후 49일간)에서 다시 환생하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부모들의 성행위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이 사랑을 나눌 때 아이들이 곁에서 지켜보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던지 숨어서 엿보는 장면도 있다.

카주라호를 가보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에는 카주라호를 어떤 커다란 호수와 연관시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카주르’ 즉, ‘대추야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힌두교 신(神) 중의 하나인 시바의 수소(소의 수컷) 바하나(vahana·산스크리트어로 ‘탈것’ 또는 ‘수레’라는 뜻)가 앉아있는 ‘Nandi Temple’, 사원 중앙에 남근이 있고 에로틱 조각상이 두 번째로 많은 ‘Visvanatha Temple’, 힌두 신 비슈누의 10가지 화신(化身)중 3번째 화신인 바라하(산스크리트어로 ‘멧돼지’라는 뜻)가 있는 ‘Varaha Temple’, 에로틱 조각상이 가장 많아 으뜸인 ‘Lakshmana Temple’, ‘Kandariya Temple’, ‘Devijagadambi Temple’, ‘Chitraagupta Temple’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마침 날씨도 청명하고 녹음이 우거진 나무숲과 만개한 꽃 그리고 초록색 잔디가 한없이 평화롭고 정겹다. 느긋한 마음으로 많은 시간을 사원 내에서 보냈다. “카주라호의 모든 사원을 부셔버리고 싶다”는 간디의 말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필자 金鍾源 박사는
고대금속유물분석센터 이사장인 공학박사이지만 빛고을 방랑자란 닉네임처럼 여행에 관심이 많아 5대양 6대주를 돌아다니는 자유배낭여행가이자 사진가, 여행칼럼니스트이다. cafe.daum.net/kjw518에 가면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중국역사기행'<도서출판 (주)경향뉴스원>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