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_left
search

 

 

ȭ
ȭ

해외 트래블 | 북인도 배낭여행기②

글 . 사진 | 김종원 박사  / 2011-11-10 11:01:18

세계 유일의 쥐(鼠)사원과
정절과 순종의 상징인 '수티(suttee)'


인도의 시골풍경을 담으며
간밤에는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는 도로변 방이라 자동차들의 귀를 째는 경적소음과 사람들의 커다란 목소리 그리고 소들의 울음소리 등으로 자다가 깨기를 반복하였다. 더군다나 이부자리마저 축축했고 가져온 얇은 침낭 속에 들어가 옷을 껴입고 잤으나 추워서 혼났다. 새벽 5시 30분경에 일어나 배낭을 정리하고 침대위에서 빈둥빈둥 뒹굴고 있자니 지루하여 숙소근처의 거리로 나가봤다. 골목은 온통 쓰레기 천지다. 소떼들이 어슬렁거리며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있다.

아침식사 후 08:40분, 대절한 봉고차를 타고 델리를 출발하였다. 비카네르(Bikaner)를 경유해 데쉬노크(Deshnoke) 지역에 있는 까르니 마따(Karni Mata) 사원을 가기 위해서다. 까르니 마따 사원을 일명 '쥐(鼠) 사원'이라고도 한다. 델리에서 비카네르까지는 500km가 넘는 거리이다. 도로교통망이 좋은 우리나라 같으면 5~6시간정도면 충분히 갈수 있지만, 12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래도 지금은 5년 전에 비해 도로사정이 많이 좋아져서 그렇지 5년 전만 해도 족히 20시간이 넘게 걸렸을 것이다.

지루한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해 봉고차 안에서 이번 여행을 함께하는 대원들과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특히 인도 나환자촌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석류정 선교사가 많은 얘기를 들려줬는데 인도사회의 모순과 이들의 의식구조에 관한 것이다. 한 예로 천민출신이 각고의 노력 끝에 대학 총장이 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높은 계급층에서는 '어쩌다 선교사를 잘 만나 성공한 놈'이라며 치부해 버렸다고 한다. 인도사회에서 법적으로는 카스트제도가 없어졌지만 수대에 거쳐 내려온 이들의 관습(계급제도)이 잠재의식 속에 특권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의사 봉급은 월 100달러 정도이며, 교사는 6만 원 정도를 받는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한참을 달려 하리아나(Haryana) 지역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을 시켜놓고 잠시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식당 건너편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우리를 구경하러 몰려왔다. 고등학생들이다. 어느 대원이 먼저 온 10여명의 학생들에게 볼펜을 나눠주자 이를 보고 계속해서 학생들이 몰려온다. 볼펜이 떨어져 더 이상 줄 수 없다고 말한 후 이들과 단체사진을 한 장 찍었다. 아무튼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다. 필자도 6․25 직후 미군들을 보면 졸졸 따라다니면서 "기브 미 껌"하며 바둑 껌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우물물 증발 막으려 지붕 씌워
점심식사를 한 후 다시 봉고차에 올라 계속 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대지는 점점 사막화가 진행 중이고 불모지에 가까운 땅이다. 이런 척박한 땅에도 인도 공작새와 야생사슴들이 산다. 다시 한참을 가다가 특이한 형태의 돔이 있어 잠시 쉬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우물이다. 돔은 이곳이 사막화가 진행 중인 지역이라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지하수를 찾아 우물을 파고 돔형으로 덮개를 만들어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한 장치 즉 물탱크이다. 여기에서 샘(spring)이라 하지 않고 우물(well)이라고 한 이유는 인위적으로 땅을 파서 물을 얻었기 때문이다. 샘은 자연적 힘에 의해 물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우물 주변에는 양동이가 놓여있고 한 남자가 도르래를 이용해 물을 퍼 올리고 있다. 일행 모두가 신기한 듯 너도나도 도르래를 돌려 버킷(bucket)에 물을 길어 올려보았다. 염소 떼를 몰고 지나가던 촌로(村老)와 어린이가 신기한 듯 우리 일행을 지켜보고 있다.

궁금증을 해소하고 용변을 본 후 봉고차에 올라 한참을 달린 후 마을이 나오자 다시 잠시 멈췄다. 여성대원들 때문에 2시간마다 한 번씩은 쉬어야 한다. 짜이(홍차에 우유와 각종 인도 향신료들을 넣어 끓인 인도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를 한잔씩 마셨다. 가게 공터에는 마을 사람들이 평상에 앉아 돈내기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수레에 나무를 가득 실은 낙타몰이꾼은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취해주기까지 한다.

캄캄한 20:40분, 드디어 'Hotel Harasar Haveli'에 여장을 풀었다. 12시간의 장거리 여행이었다. 호텔 별실에 배낭을 넣어두고 곧장 본관 옥상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양고기를 넣은 밥과 닭고기를 넣은 밥 그리고 탄두리 치킨도 먹었다. 탄두리 치킨(tandoori chicken)이란 탄두르(tandoor)라는 인도 전통의 진흙오븐에서 구워낸 닭고기를 말하는데 담백하고 맛있다. 탄두리 치킨을 안주 삼아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나눠 마셨다. 소주가 식도를 타고 들어가니 쌔한 기분에 오늘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나환자와 함께하는 석선교사의 삶
05:30분경에 일어났다. 게스트 하우스가 시내 외각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자동차들의 고막을 째는 경적이 들리지 않아 잠을 푹 잤다.
주변 환경도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어느 방에선가 일부 개신교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입으로만 열심히 기도하는 척 떠버리며 남에게 내보이기 좋아하는, 그리고 신앙을 하나의 액세서리로 생각하며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그것도 부유층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반인들도 가까이 다가서기를 꺼려하는 나환자라는 최하위층의 사람들에게 온몸을 던져 실천적 삶을 살고 있는 석류정 선교사의 삶이 참다운 신앙인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07:30분에 만나 아침식사를 하였다. 옥상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마침 떠오르는 일출광경이 장관이다. 이모 대원은 200mm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일출광경을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고, 서모 대원은 내가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프로정신이 희박하다며 핀잔을 준다. 그래서 "아무리 프로라고 하지만 프로도 가끔은 무거운 카메라로부터 해방되고 싶을 때가 있다"며 한바탕 웃었다. 사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로 인해 골병이든지 이미 오래다.  

쥐들의 천국 까르니 마따 사원
봉고차에 올라 비카네르에서 동남쪽으로 36km쯤 떨어져 있는 까르니 마따 사원으로 갔다. 일명 '쥐(鼠) 사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사원은 두르가의 화신인 까르니 마따를 숭배하기 위하여 19세기 비카네르 지역의 마하라자 강가 싱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아마 전 세계계적으로 쥐를 숭배하는 사원은 이곳 단 하나뿐일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쥐 사원에 담긴 신화를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700년 전, 두르가(Durga․전쟁의 여신)의 화신이었던 '까르니 마따'가 살았다고 한다. 까르니는 결혼을 했지만 신의 화신이어서 신방(新房)에 들어가지 않고 대신 자신의 동생을 들여보냈다.

그 후 동생이 아들을 낳았는데 어느 날 아들이 물에 빠져 죽자 동생은 까르니 마따(Mata는 '어머니'란 뜻)에게 죽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살려주기를 간청했다. 까르니 마따는 죽은 아이를 죽음의 신인 야마(Yama) 신에게 데리고 가서 살려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야마 신이 말하길 "죽은 자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살려 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화가 난 까르니 마따는 신에게 반발하여 자신들의 후손들은 그 법칙에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 후로 자신의 자손들이 죽으면 쥐로 태어나고 쥐가 죽으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법칙을 정한다. 이후 까르니 마따 후손들은 쥐와 사람으로 계속되는 윤회(輪回)를 격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어디까지나 설화일 뿐이며, 이 외에 이와 관련한 수많은 얘기들이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원 입구 좌측에 신발은 벗어놓고 양말만 신은 채, 쥐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즐비하게 싸놓은 쥐똥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을 방문하는 신도들은 쥐 사원 입구의 문턱에 입맞춤을 하며 경의를 표한다. 사원 중앙에는 신전이 있다. 많은 순례 객들이 붉은 터번을 쓴 힌두교 성직자의 주관 하에 의식을 행하고 있다.
신전 안에서는 불을 지피고 계속해서 종을 친다.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순간 관리인이 다가와서 입장료 외에 캠코더 50루피, 카메라 20루피를 더 달라고 한다. 돈을 주자 영수증까지 발급해준다.

동굴 같은 신전 안에는 까르니 마따 신상이 있고 그 앞에 신에게 바칠 음식이 쟁반에 놓여 있다. 쥐들이 먼저 맛을 보며 돌아다니는데도 쫓는 이는 아무도 없다. 두르가의 화신이며 자기들 선조들이 와서 음식을 맛보는데 감히 누가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이곳뿐만이 아니다. 신전 안 넓은 공간 곳곳은 쥐들의 세상이다. 쥐구멍에서는 쥐들이 계속 드나들고, 커다란 고무대야에는 하얀 우유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쥐들이 삥 둘러앉아 맛있게 목을 축이고 있다.

또한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철재로 막아놓은 쥐들만의 공간에는 곡식창고도 있다.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발등에 올라타기까지 하는, 겁 없고 귀엽게 생긴 쥐들이다. 한편 이곳에는 흰쥐가 있어 이 흰쥐를 보면 행운이 깃든다고 하여 흰쥐가 나올만한 구멍에 눈을 고정하고 한참을 응시했으나 결국 나타나주질 않는다.
이 사원에는 15만여 마리의 쥐가 있다고 한다. 집단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는 셈인데, 그 개체수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아 거의 동일한 수의 쥐들이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쥐들은 사원 안에만 있고 사원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는단다.
배불리 먹을 수 있고 가장 안전한 그리고 자기 후손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 이곳을 뭐하려 나가려하겠는가. 나 같아도 나가려하지 않겠다. 간혹 늙어 힘없는 쥐들도 눈에 띈다. 사원에서 나와 신발을 신으려고 발바닥을 보니 양말에 많은 쥐똥이 묻어있다. 그러나 전혀 더럽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음 글은 수필가인 석선교사가 인도를 함께 여행 후 돌아와서 '비카네르, 그 충격의 쥐 사원'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다.

정절과 순종의 상징인 '사티'
쥐 사원에서 나와 봉고차에 올라 한참을 달려 '주나가르 성(Junagarh Fort)'으로 갔다. 성 입구를 들어서자 성벽에 붉은 색의 손바닥들이 부조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보기만 해도 섬뜩하다. 이 부조는 '사티'라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인데, 남편이 죽어 화장(火葬)할 때 아내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죽는 풍습으로 정절과 순종의 상징으로 여겼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라자스탄에 있었던 악습(惡習)이다. 옆에 있는 석판에는 이에 대한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다. 이 성도 새들의 배설물로 인해 피해가 큰지 상단부에 그물을 설치해 새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성안을 한 바퀴 돌고 나오자 한쪽 팔이 없는 걸인이 다가와 구걸하기에 10루피를 적선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2루피 정도 줬을 텐데, 팔이 없는 특별한 경우라 10루피를 준 것이다. 의원회관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시위를 벌이고 있다. 별로 볼 것이 없는 주나가르 성에서 나와 봉고차를 타고 타르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자이살메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