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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물결에 물든 겨울 서정’

생태와 역사를 찾아 순천 나들이

서석진 기자(mrseokjin@newsone.co.kr)  / 2011-02-07 14:52:29

올겨울은 유난히도 동장군의 기세가 꺾일 줄을 모른다. 그늘진 거리에는 며칠째 녹지 않은 눈 무더기가 얼룩진 채로 쌓여 있고, 두꺼운 외투로 무장한 시민들은 가까운 레스토랑이나 멀티플렉스 따위를 잰걸음으로 오가며 휴일을 즐긴다.

하지만 매년 이맘때가 되면 기억 저편 지워진 순천만이 본능처럼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 아마도 온통 황금빛 물결로 물든 풍경이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던 탓이었으리라. 동장군 눈치만 살피기에는 첫사랑의 순정처럼 밀려오는 순천만의 모습이 너무도 애틋해 주저 없이 순천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생태계의 보고 ‘순천만’
세계 5대 연안습지이자 한국 최대의 갈대 군락지인 순천만 해안선의 길이는 39.8km에 달하고, 갯벌 면적도 22㎢(670 만 평)에 이른다. 이토록 광활한 갯벌과 갈대밭을 지닌 순천만에는 각종 염생 식물 30여 종과 맛조개, 참꼬막, 방게, 칠게, 농게, 짱뚱어, 갯지렁이 등 다양한 저서생물(바다 밑에 사는 생물의 총칭)들이 특유의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특히 갈대숲을 S자로 관통하는 탐방로를 따라 거닐다 보면 갯벌이 속내를 드러내는 곳에서 잠시 이러한 생명력을 간직한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가 있다.

어디 이뿐일까. 생태계의 보고인 순천만에는 조류나 어패류 등 각종 먹잇감이 풍부한 탓에 매년 겨울마다 철새들의 낙원을 이룬다. 특히,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흑두루미(천연기념물 제228호)는 이 일대를 찾는 200여 종, 2만여 마리의 조류 가운데 대표적인 겨울철새다. 주로 첫 서리가 내리는 10월경에 날아와 이듬해 4월 러시아나 몽고 등을 향해 먼 여행길에 오른다. 여기에 청둥오리와 검은머리갈매기, 노랑부리저어새, 민물도요, 큰고니, 흑부리오리, 왜가리 등의 철새가 무리를 지으며 차디찬 겨울을 평화롭게 함께 보낸다.

하지만 순천만의 절경은 따로 숨어 있다. 용산전망대에 오르고 나면 비로소 뜨거운 탄성과 함께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바로’2006년 자연경관 최우수상’을 수상한 S자 수로가 그것이다. 해질녘이면 여인의 아름다운 곡선처럼 매혹적인 모습을 드러내는데 부드럽고 휘어져 나가는 수로는 직선적으로만 살아온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그 곁으로 크고 작은 원형의 갈대밭과 일 년 동안 일곱 번 빛깔을 바꾼다는 칠면초 군락이 미스터리 서클처럼 늘어져 있어 주말이면 이러한 풍광을 닮으려는 사진애호가들로 줄곧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무진 안개 찾아가는 ‘순천만기행’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무진기행 中-

한국전쟁 이후 발표된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도입부다. 이 소설 ‘서울과 시골, 현실과 과거, 세속과 허무 등 2항 대립적 요소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팽팽한 갈등과 대립구도로 글의 긴장감과 주요 메시지를 전해준다. 추억으로 도피하고자 했던 주인공이 결국 현실로 다시 되돌아오는 60년대 도시민 삶의 실존을 리얼하게 그려내 평단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시, 소설, 수필을 불문하고 문학작품 세계에서 서정적 배경으로 즐겨 사용되는 안개·바람·햇빛이라는 자연현상 관련 소재가 작가의 탁월한 실존적 묘사를 통해서 인간 감수성의 내면을 그려내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남녘 소도시 즉 순천만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무진읍내를 짙게 감싸던 안개는 한 귀향자의 허무를 암시하고 있다.

짙은 안개로 뒤덮인 그곳은 대립적 구도의 각을 세운 채, 이상과 현실의 심연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현대인의 내면의식이 서려 있는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이루는 무진(霧津)이 순천만 다대포구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김승옥은 순천중학교와 순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소설에서 언급한 ‘무진’이라는 공간에 대한 몽환적 묘사는 1950~1960년대 안개 짙은 순천만을 염두에 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반세기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순천만은 세계 5대 연안습지로 주목받으며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빛바랜 기억의 보물창고, 낙안읍성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도 일찌감치 이엉잇기를 마친 초가들로 인해 황금물결에 빠져 있다. 이곳 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서 성내에는 성(城)과 동헌, 객사, 초가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지난 1983년 국내 최초로 마을 전체가 사적 제302호로 지정됐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에 왜구들이 침략하자 이 고장 출신인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구축하고,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던 유서 깊은 충절의 마을이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에는 임경업(충민공)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끊어진 곳이 없도록 견고하게 쌓아 중수(重修)했고, 현재에도 주민 108세대가 직접 거주하며 농사를 짓거나 방문객을 대상으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낙안읍성을 둘러보면 마을 전체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사극 촬영세트장이자, 오랜 민속자료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는 민속학박물관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일반 관광객들은 물론 유치원생부터 초중고생에 이르기까지 대단위 수학여행 단체방문객들로 성안은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마을 곳곳에는 고관대작 양반들이 살았던 웅장한 가옥이 아닌, 평민들의 삶과 애환이 묻어나는 초가집과 툇마루, 토방, 이엉지붕, 섬돌 위 장독, 아궁이 부엌 등 우리나라 중부지방 주거양식이 고스란히 발견된다.

마을 이웃 간의 따뜻한 정은 호박넝쿨과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른 돌담들이 잇고 있으며,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돌아가다 보면 마을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동심 속으로 달음질치게 된다. 이러한 광경을 보노라면 어린 시절 마을 돌담길 사이사이에 숨어 술래잡기하던 아련했던 기억들이 피어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