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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 했다’

실학자 정약용이 자체방어력 갖춘 경제도시로 설계

이승현 기자 (ysh@newsone.co.kr)  / 2011-02-07 11:15:57

정조가 왕위에 오르던 당시는 신권보다 왕권이 아주 약했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왕권 강화책의 하나로 신도시 화성을 계획했다. 정치 주도권을 잡은 신료(서인)들의 지지기반인 서울 상권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의 거점으로 교통의 요지인 화성을 꾀한 것이다.

신도시는 중앙에서 마련한 도시 계획의 원칙에 따라 지방도시의 계획을 짰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하나의 주산 아래 관청이 남향으로 배치되고 간선도로는 동서로 나 있는 형태였다.
신도시 수원은 팔달산을 뒤에 두고 그 아래에 관청이 배치됐다. 그런데 관청은 남향이 아니라 동향이며 간선도로는 자연히 남북 방향으로 놓이게 됐다. 이는 지형 조건보다도 서울에서 이어진 간선도로의 방향을 더 중요시한 까닭이다.

정조는 화성을 도성에 버금가는 유수부로 승격시켰으며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배속시켰다. 그러고 나서 1794년부터 화성에 성곽을 축조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경제도시도서의 화성
“일한 만큼 나라에서 돈을 쳐준다는 게 사실인가?”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화성으로 모여들었다. 화성 축성 공사에는 모두 22 직종 1840명의 장인이 동원됐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노임을 지급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백성을 모아서 강제로 노역을 시킨 예전에 비하면 새롭게 나타난 제도상의 변화였다.

정조는 화성의 축성 계획을 정약용에게 맡겼다. 정약용이 연구 끝에 제안한 화성 축성의 특징은 기존의 읍성과는 크게 달랐다. 성의 규모를 적절한 크기로 줄이고 성벽에 방어시설을 가득 설치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소통이 활발한 경제도시로서의 화성을 염두에 둔 설계였다.

정조는 화성을 쌓기 전에 먼저 팔달산에 올라가 성을 쌓을 적당한 자리와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도로와 상가, 민가 등이 들어앉을 곳을 살폈다. 화성을 쌓는 데 총책임을 맡은 채제공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빨리 서두르지 말 것, 둘째 화려하게 하지 말 것, 셋째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등이었다.

화성 축성 공사에 쓰일 방대한 물량도 당시에 발달한 민간 자재상한테서 샀다. 석재는 화성 북쪽 가까이에 있는 숙지산에서 떠온 돌을 사용했다. 관청에서는 석재의 규격에 따라 값을 매겨놓고 일꾼들이 돌을 가져오면 그 값을 쳐주었다.

특히 화성의 축성 공사에는 자재 운반을 위한 장비가 다양하게 활용됐다. 자재 운반용 기구로는 정약용이 고안한 유형거와 거중기 등을 비롯한 신종 장비와 전통 장비가 여럿 있었다. 이런 장비의 활용은 일의 능률을 높여 공사 기간을 단축했을 뿐만 아니라 일꾼에게 지급하는 노임을 줄이게 했다.

수원의 중심에 우뚝 선 화성
1796년 9월 화성행궁에는 풍악이 울리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화성 축성 공사를 시작한 지 2년9개월(1794.1.25~1796.9.10) 만에 드디어 화성 쌓기가 끝났고 이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그리고 공사의 모든 일을 책으로 정리했다. 이것이 바로 ‘화성성역의궤’다.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가 현재도 남아 있다.
다 지어진 화성의 모습은 기록에 따르면 이러했다. 팔달산 정상에는 서장대가 서 있고 산기슭을 따라 성벽이 좌우로 이어진다.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마다 각종 시설물이 갖춰져 있다.
사방의 성문들은 모양도 웅장하고 문 앞에 옹성을 둘러서 더욱 견고한 느낌이다. 성문 주변에는 감시용 망루 건물이 높이 자리하고 있다.

수원천이 들어가는 북수문(화홍문)에는 홍예문이 7개나 나 있고 그 위에 누각이 세워져 있다. 그 옆 언덕에는 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올라앉아 있고 그 바깥으로 가운데에 섬이 있는 용연이 보인다.

동쪽으로 가면 사이사이에 포루와 치성이 일정한 간격마다 세워져 있으며 중간에는 봉돈도 있다. 팔달산의 남쪽 기슭으로는 성벽 바깥쪽으로 좁은 길이 이어지고 그 끝에 화양루가 세워져 있다. 팔달산 아래 성안에는 행궁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지난다.

이 같은 모습을 한 화성이 일반 읍성과 다른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다른 성곽에는 없는 새로운 방어시설을 가득 설치한 점이다. 화성에는 따로 산성이 없었으므로 읍성 자체의 방어력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방어시설 대부분이 벽돌로 지어졌다는 점이다.

화성의 번영과 쇠퇴
화성행궁은 처음 수원부 관아의 일부로 지어졌다가 화성을 축성하면서 크게 증축됐다. 그 규모는 조선시대 행궁 가운데 최대였다. 새로 지은 건물을 합쳐 관청과 행궁의 규모는 620여 칸에 이르렀다.

화성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부터 타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와 차츰 인구가 늘어났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성내 가옥도 늘어났고 집의 규모도 예전 구읍 시절보다 켜졌다.
이렇듯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신도시 화성은 분명히 조선시대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혁신적이며 화성만이 갖는 도시의 선진성이기도 했다. 화성은 그때부터 대도시로 발전할 발판을 마련한 상태였다.

하지만 화성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화성 성곽은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화성은 왕실을 위한 도시였다. 화성은 왕조 사회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런 한계로 왕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면 도시 건설 자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기게 마련이다.
1800년 정조는 갑작스레 죽었고, 화성의 번영도 더뎌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