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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찾아 떠나는 여행 ① | 영도를 지켜온 영험한 주산, 봉래산

장사바위와 산제당의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이주형 기자(ljy2007@newsone.co.kr)  / 2010-09-06 09:03:53

본지는 이번 호부터 ‘설화 찾아 떠나는 여행’을 소개한다. 아름다운 보석처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떠나간 고장은 부산광역시 영도구. 깨끗한 자연환경과 소박한 삶이 꿈틀대는 영도에는 부산의 대표 관광명소인 태종대와 관련된 ‘신선대’, ‘망부석’, ‘주전자섬’ 등의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호에는 영도의 주산인 봉래산에 위치한 ‘장사바위’와 ‘산제당’에 관한 전설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장사바위에 얽힌 설화
“야! 이 괴물 놈아! 우리 마을에서 어서 썩 꺼져!”
장사는 우두커니 서서 동네 꼬마들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러다 골목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던진 주먹만 한 돌멩이가 갑자기 머리 위로 날아들었고, 금세 동백꽃 같은 선홍빛 선혈이 이마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장사가 돌팔매질을 당하기 시작한 건 화마가 집안을 휩쓸고 나간 이후부터였다. 열 살이 되던 해, 그는 원인 모를 큰불로 한순간에 집과 가족을 모두 빼앗겼고 대신 온몸 여기저기 비명 섞인 상처를 깊게 새겼다. 게다가 얼굴마저 심하게 일그러진 탓에 말을 뱉을 때면 마치 들짐승의 울음처럼 괴괴한 소리를 토해야만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치 흉측한 벌레라도 보듯 장사를 피해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고, 아이들은 지레 겁을 먹고 울거나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괴물로 살아온 그는 결국 마을 사람들의 눈총을 벗어나 봉래산 깊은 기슭으로 내쫓기듯 도망치고 말았다.
“요녀석들아. 나는 괴물이 아니니까 그러지 말어…….”

장사는 소매 자락을 당겨 이마에 맺힌 피를 훔쳤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쫓아오는 아이들을 따돌리려 황황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홉 척이 넘는 거대한 몸집에도 그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빨랐고 맹수보다 민첩했다.

사실 장사가 마을에 내려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수백 년 만에 몰아닥친 극심한 가뭄으로 비축했던 식량마저 동난 마당에 혹독한 한파까지 겹치자 그는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집집이 돌아다니며 남은 음식이라도 나눠달라고 부탁했지만, 가뭄이 할퀴고 지나간 마을은 이미 인심마저 흉흉해진 뒤였다.

장사는 허기진 배를 쥐고 마을을 배회했다. 결국 어느 허름한 초가 앞에 멈춰선 그는 물이라도 얻어 마실 요량으로 사립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여인이 손에 물기를 털며 정지에서 뛰쳐나왔다. 장사를 마주한 여인의 얼굴에서 흠칫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속사정을 듣고는 말없이 정지를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갔다.

“보시다시피 세간이 변변찮은지라 드릴 것이라고는 감자 몇 개가 전부입니다.”
단아한 기품의 여인은 냉수 한 사발과 정성스럽게 준비한 보따리를 내밀었다. 여인의 새하얀 손이 장사의 손등을 스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대체 지금 무얼 하는 짓이냐!”

때마침 귀가한 여인의 오빠가 잔뜩 화난 표정으로 다가와 거칠게 보따리를 낚아챘다. 그러자 보따리에서 쏟아진 감자들이 어지럽게 바닥에 나뒹굴었고, 잠시 무거운 정적이 세 사람 사이를 갈랐다. 오빠의 거침없는 행동에 놀란 사람은 장사보다 오히려 여인이었다. 여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한 얼굴로 떨어진 감자를 주워 장사의 가슴에 안겼다. 그리고 그의 등을 사립문 밖으로 가볍게 떠밀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방 내뱉었다.

“저런 괴물 같은 놈에게 나눠줄 식량이 어디 있다고 함부로 감자를 내어주는 것이냐.”
장사의 뒤에서 여인을 꾸짖는 날 선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슴에 안은 감자를 조심스럽게 집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신 마을에 내려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봉래산을 향해 숨이 멎도록 달리고 또 내달렸다.

겨우내 장사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는 동안 봉래산에는 어느새 새봄이 찾아왔다. 나무가지마다 파릇한 새싹이 돋아났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동물들이 산기슭을 뛰어다녔다.

그런데 동백이 꽃망울을 터뜨리던 어느 날, 마을 앞바다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약동하는 봄기운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점점 엄습해오는 어둠의 공포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왜놈이다! 왜놈들이 마을을 침략했다!”

이윽고 바다를 가득 메운 그림자는 수없이 많은 왜구를 쏟아냈고, 매일 같이 재산과 식량을 강탈해갔다. 마을은 하루가 멀다고 쑥대밭으로 변해갔지만, 누구 하나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왜구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더욱 거침없이 날뛰었다.

마을의 남은 재산과 식량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젊은 처녀들을 납치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여인의 초가에 당도한 왜구는 집에 불을 질렀고, 이를 막던 오빠를 단칼에 찔러 목숨을 빼앗았다. 여인은 피를 흘리고 쓰러진 오빠의 시신을 품에 앉고 몹시 크게 흐느꼈다. 마치 그 울음소리는 흡사 땅을 울리고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무척이나 크고 구슬펐다.

그러자 봉래산에서 그 울음을 전해들은 장사가 여인을 찾아 단걸음에 날아왔다. 그는 여인을 납치하려는 왜구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적의 수가 너무 많아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거, 걱정하지 마, 말아요.” 장사는 슬픔에 잠긴 여인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왜구의 두터운 호위를 뚫고 우두머리 장수와 함께 깊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왜구는 장수가 바다에 빠져 숨지자 겁에 질려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마을 앞바다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느덧 마을에도 잃어버린 평화가 다시금 찾아들었다. 하지만 오빠와 장사를 눈앞에서 잃은 여인은 매일 밤 봉래산 아리랑고개에서 붉은 꽃 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러자 언제부터 아리랑고개에는 장사의 신발과 닮은 커다란 바위가 생겨났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장사바위’라 불렀다.

산제당(山祭堂)과 아씨당(阿氏堂)의 전설
영도는 예로부터 천리마가 달리면 그림자도 끊어질 만큼 빠르다 하여 ‘절영도(絶影島)’라 불렸다. 신라 시대에는 국마장을 운영해 전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명마들이 즐비했고, 조선시대에는 군마를 보관하는 요충지로 그 명성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멀쩡하던 군마들이 시름시름 병을 앓다 죽는 일이 일어났다. 군마 관리를 책임지던 부산진첨사는 그 원인을 밝히려고 노심초사했지만, 결국 헛수고로 돌아가자 점차 깊은 시름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자 항간에서는 ‘한 선녀가 노복(奴僕) 둘을 데리고 절영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나오는 것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는 기괴한 소문이 나돌았고, 사람들은 군마가 병사하는 이유를 필경 그 선녀의 소행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군마가 병사하는 원인을 밝히려고 정발(鄭撥) 장군을 부산진첨사로 새롭게 임명했다. 키가 여섯 척이 넘는 정발 장군은 어떠한 난관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당찬 무관으로 조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정발 장군이 부산진첨사로 부임한 첫날, 그는 모든 군사를 집결시켜 군마가 까닭 없이 죽는 이유를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엄명했다. 하지만 이튿날에도 군마는 영락없이 죽은 채로 발견됐고, 사건은 점차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절영도에 갑자기 세찬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쳤다. 서둘러 채비를 준비한 정발 장군은 목마장을 직접 둘러보며 군마의 건강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다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정발 장군은 밀려오는 오한에 서둘러 침소에 들었고, 이날따라 유난히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장군님!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옵소서…….”
선녀가 슬픔에 젖은 얼굴로 정발 장군을 구슬프게 불렀다.
“너는 대체 누구기에 이다지도 슬피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정발 장군은 피눈물을 흘리는 선녀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차근차근 그 연유를 물었다.

“이 몸은 칠원성군으로서 옥황상제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천상에서 쫓겨 탐라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헌데 하루는 고려국의 최영 장군이 침략해왔고, 성 둘레에 갈대를 심고 불을 놓아 결국 탐라국이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영 장군의 첩이 되어 일편단심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그분은 나랏일이 바빠 탐라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년 동안 소식마저 끊겨 독수공방으로 지내오던 저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그 소식이란 게 무엇인지 계속 말해 보아라.”
“그것은 신돈의 모함으로 최영 장군이 절영도에 유배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다를 건너 절영도까지 단걸음에 달려왔지만, 이곳 어디에도 최영 장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분이 절영도에 유배됐다는 소식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저는 이곳에서 한 많은 청춘을 마치고 고독한 영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라옵건데 장군께서 사당을 지어 저의 외로운 넋을 위로해 주신다면 앞으로 군마가 죽는 것을 막아드리고 나를 모시는 사람은 모든 것을 뜻대로 이뤄 소원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정발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곧장 조정에 상소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산제당과 아씨당을 건립해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씩 정성껏 제사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그 후 동래부사는 절영도에 산제당과 아씨당을 세워 매년 정중하게 당제를 모셨고, 그러고 나자 군마가 갑작스럽게 폐사하는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