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_left
search

 

 

ȭ
ȭ

나옹선사의 혼이 담긴 천년 고찰 ‘신륵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운 여주의 중심

이승현 기자 (ysh@newsone.co.kr)  / 2010-05-06 09:06:17

불기 2554년 석가탄신일을 맞아 <문화관광저널>에서는 이번 호부터 지역 유명 사찰을 탐방해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달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수려한 풍경과 깊은 역사를 간직한 경기도 여주군의 ‘신륵사’를 찾았다.

여주 신륵사는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사찰 앞으로는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유유한 자태로 흐르고 있어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조선 초 문인 김수온은 이러한 신륵사의 절경에 대해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해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 불렸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했다.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이 절의 내력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이나 유적이 없고, 고려 우왕 2년(1376)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됐다.

신륵사는 절 이름과 관련한 전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신기한 미륵 또는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져 신력(神力)으로 제압했다고 해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풍스런 분위기의 사찰 안에는 먼저 구룡루가 관람객을 맞이하며 이곳을 지나면 신륵사의 금당으로 아미타불의 도량인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구름과 용무늬가 아름다운 다층석탑이 소담스럽게 서 있다. 그림 같은 단칸집 조사당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나옹선사의 석종부도와 목은 이색이 썼다는 부도비, 석등이 신륵사의 고풍스런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있다.

또한 신륵사를 일명 ‘벽절’이라 부르게 한 다층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아직도 그 옛날의 시인묵객들이 시 한 수를 읊고 있는듯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고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의 유명한 시다.
신륵사에 관한 모든 기록은 고려 말 나옹선사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일 만큼 나옹 선사 이전의 역사는 기록이 없다. 나옹 선사의 입적 후 신륵사는 거의 개창되다시피 사찰의 면모가 일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도로 나옹 선사의 사건은 사찰의 역사에서 비중이 크다.

나옹 선사가 화장된 곳에 삼층석탑이 남아 있고 절 뒤에 부도를 세운 것은 기념비로서의 구조물이지만 그보다는 그의 공덕으로 인해 절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 신륵사로서는 중요한 일이다. 나옹 선사가 돌아간 해에 석종이 세워지고 동시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때의 중창이 신륵사의 골격을 분명히 한 계기일 것이다. 후에 조선시대에 또 한 번의 중창이 있기는 하지만 고려 말의 모습을 크게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가정해 본다면 지금 남아있는 극락보전과 좌우의 건물, 그 앞의 누각이 나옹 입적후의 중창 모습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 말의 신륵사에 관한 일로서 첨가할 일은 2층으로 된 대장각을 건립하고 대장경 일부를 봉안한 것이다. 이것이 1382년(우왕 8년)의 일로서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었던 도은(陶隱) 이숭인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조선시대 들어 신륵사는 세종대왕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 또 한 번의 중창의 기회를 맞게 된다. 본래 경기도 광주 대모산(현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군으로 이장한 것이 예종 1년(1469)의 일이다. 곧 이어서 영릉의 원찰을 짓는 일이 거론되다가 한명회 등의 건의에 따라 가까이에 있는 신륵사를 원찰로 해 중수하게된 것이다.

영릉을 원찰로 세우고자 처음 발원을 했던 것은 세조로, 그 유지를 계승하여 실현시킨 것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이며 성종의 할머니가 된다. 신륵사의 중수불사가 끝난 다음해 그녀는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바꾼다.

나옹 선사 입적후의 중창에서 조선조 성종기의 중창사이에는 100년의 기간을 두고 있다. 성종의 중수 이후, 또다시 몇 번의 중수공사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어떠한 종교적인 발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병화로 피폐된 사찰을 복원시키는 쪽으로의 불사(佛事)로 봐야 할 것이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지만 오히려 더 알려져 있고 역사가 깊으며 규모도 웅장하고 주위의 경관까지 뛰어난 사찰이 바로 신륵사다. 절집 경내엔 화려한 극락전을 비롯, 조사당 명부전, 다층석탑, 다층전탑, 석종,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곳 일원은 1977년에 관광지로 지정되어 일년 내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