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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국민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가

글 | 전병열 본지 편집인  / 2010-03-04 13:52:33

그녀는 불행한 사람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학교를 무사히 다녔고 유학까지 갔다 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항상 자격지심이 자리하고 있다. 친구의 도움이 가진 자의 동정심과 자기만족을 위한 배려일 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녀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 친구를 향한 시기와 질투에 못 견뎌 오히려 은혜를 배신으로 앙갚음하려 한다. 그녀는 사악한 여자로 그려진다.

그녀의 가정환경 또한 극히 불우하다. 생계의 위협 속에 그녀의 엄마는 전과자인 연하의 남자와 동거하며 그녀가 처한 상황을 이용해 그녀의 애인에게 돈을 갈취하려 음모를 꾸민다. 서로 간에 모녀라는 천부적인 혈연의 정만 남아있을 뿐이다. 엄마의 남자는 우범자이다. 그의 선후배들 역시 전과자이며 불량스런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애인은 가난에 한이 맺혀 부유층과 정략결혼을 계획한다. 미국 유학 중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지만 배신하고 우연히 알게 된 재벌가의 딸인 그녀의 친구를 유혹해 결혼에 성공한다. 그녀의 끈질긴 호소와 위협을 무마하려고 동침까지 하지만 임신을 시키고 만다. 그녀는 임신을 무기로 그 남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온갖 공작을 계획하고 전개한다. 그 남자 역시 음모와 협박으로 그에 대응한다.

그 남자의 가정환경 역시 그녀와 같이 불우하다. 밑바닥 생활이 지긋지긋한 그의 홀어머니는 오직 돈에 눈이 먼 사람이다. 도의나 윤리도 없다. 부유한 사돈집을 이용해 오직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도덕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파렴치하고, 불량스런 우범자들로만 설정돼 있다.

한편, 그녀의 재벌 친구는 보육원 봉사를 하는 등 천사 같은 마음으로 그녀와의 우정을 돈독히 하려고 한다. 그녀를 친 딸처럼 여기는 친구의 부모들 역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인물로 설정돼 있다. 가진 자의 여유로움과 포용, 배려가 돋보인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어느 아침 드라마의 이야기다. 필자도 어느 날부터 이 드라마에 이끌려 출근시간이 늦어지기도 한다. 아침 드라마가 주로 불륜을 소재로 하는 ‘막장드라마’인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 드라마는 색다른 면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주인공의 불우한 환경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는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 행복을 찾는 과정으로 구성돼 비슷한 처지의 시청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더욱 참담하게 비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웃고, 울고, 분노하는 시청자들에게 불우한 사람을 도와주다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 구했더니 보따리 내놔라’ 하는 꼴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의식이 팽배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이 미칠 우려가 있다. 자칫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인격을 비교해 가난한 사람을 비하시키고 부자들을 선망하는 사회풍조로 비약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소위 ‘강부자’ 정권을 비호하기 위해 부자들을 미화시킨 드라마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일부 진보 언론에서는 ‘정권의 방송장악이 진행 중’이라며, 그 폐해를 우려해 크게 반발하고 있는 민감한 시점이다. 이러한 때 만에 하나라도 정권이 드라마를 통해 이념을 전파하려는 시도를 숨기고 있다면 엄청난 역풍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다른 드라마에도 비난이 쏟아졌지 않은가.

경찰청 지원을 받아 제작한 주말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이 노골적으로 시위대와 언론에 대해 비판한 발언이 논란을 빚었다. 이에 대해 일부 시민단체는 “철저하게 경찰을 집회·시위의 ‘피해자’로, 시위대는 ‘가해자’로 모는 시각은 이명박 정권 아래 벌어지는 기본권 침해와 공권력 남용을 은폐하고 감싸는 현실 왜곡”이라고 지적했다.

방송 드라마를 통해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전 근대적인 산물이다. 아직도 6∼70년대처럼 국민을 우매하다고 보는 위정자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방송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은 현명하다. 그렇잖아도 막장 드라마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시청자들을 더 이상 우롱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