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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목적은 사회통합이다

글 | 전병열 본지 편집인  / 2009-06-02 14:43:46

"각계에서는 소통 부재의 책임을 놓고 ‘내 탓 네 탓’으로 갑론을박이다. 특히 ‘미디어법안’이나 ‘집시법’, ‘남북문제’ 등을 놓고 아전인수격으로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정작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소해야할 당사자들이 소통 단절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소통(疏通)’이란 말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발생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며 ‘국민소통비서관’을 임명하면서 ‘소통’은 한국사회 지배담론의 핵심단어가 된 계기가 됐다. 그 전까지는 영어인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단어를 ‘의사전달’이란 개념으로 주로 사용해 왔다. 이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과 소통을 같은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커뮤니케이션은 하나의 과정으로 그 궁극적인 목적이 소통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다는 것은 소통됨을 의미한다.

소통의 중요성은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가 익히 체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소통은 의·식·주와 같이 인간 생존의 필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이 단절되면 죽음에 이른다고 했다. 실제 월남전에서 미국 포로로 잡혀있던 버진 맥대니얼 대위는 자신의 책에서 ‘포로들이 서로 소통을 못하면 훨씬 더 빨리 죽어나갔다’고 기록했다. 작금에 발생한 전직 대통령의 비통한 투신 사건도 소통 단절이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등 각계에서는 소통 부재의 책임을 놓고 ‘내 탓 네 탓’으로 갑론을박이다. 특히 ‘미디어법안’이나 ‘집시법’, ‘남북문제’ 등을 놓고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고 있다. 정작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소해야할 당사자들이 소통 단절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결코 소통의 해법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소통 장애를 해소해야할 주체(communicator)가 당리당략적이고 이기적인 논리를 개발해 권위주의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면 불통될 수밖에 없다.

소통의 주체는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상호간에 믿음이 전제돼야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진심을 알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저변에 불신이 존재한다면 결코 본심을 표출시키지 않을 뿐더러 반대를 위한 반대가 난무하고 아집을 꺾지 않는다. 신뢰가 없이는 상호간 적대적의 관계일 뿐 통합을 이룰 수가 없다. 살기 위해서는 적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상호 신뢰가 있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입장을 바꿔봐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돼보지 않고서는 결코 원활한 소통이 이뤄질 수 없다. 상대방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할 수 있어야 자신의 고통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상호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 한다면 소통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은 활발해질 것이다.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테크닉이 필요하다.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설득이며 그 효과는 소통으로 나타난다. 즉 대화를 통해 상대를 설득시키고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소통이 원활해지며 사회통합이 이뤄진다.
설득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기법은 먼저 듣는 것부터 익혀야 한다. 또한 상대의 의견을 제대로 청취하려는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 황당한 주장일 수도 있고 이치에 어긋난 호소일 수도 있다. 절박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긍정적인 마음에서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하소연함으로써 울분이 해소될 수도 있으며 긍정해 줌으로써 동지적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설득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다음으로 설득논리의 개발이다. 주장은 상호이익(win-win)이 전제돼야 한다. 전체주의적 사고로 개발된 논리는 반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개인의 이익이 곧 전체의 이익임을 믿을 수 있도록 개발돼야 한다. 일부 권력자나 전문가의 권위주의적인 설득논리보다 시민의 반론을 수용한 민주적인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게 마련이다.
그리고 다양한 소통매체의 활용이다. UCC 시대의 도래로 쌍방향성이 보편화되고 있다. 인터넷이나 휴대폰이 소통매체로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제하려들지 말고 오히려 활성화시켜 소통의 기재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낮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뉴미디어를 규제해선 안 된다.
아울러 진정한 소통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 순환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국민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국민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