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특급 호텔은 객실이 아주 넓다. 필자가 묵은 호텔은 트윈룸으로 대부분 더블베드가 2개씩 놓여있었다. 중국의 넓고, 크고, 많다는 특징이 느껴진다. 거기다 화려함과 웅장함까지 더해지면 중국의 자랑거리가 된다. 넓은 공간이 오히려 호젓하다. 상해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어 잠까지 설쳤다. 아침 식사는 뷔페식이다. 중국 전통요리와 양식으로 준비돼 있으며 김치도 나왔다. 처음보다는 익숙하게 중국 요리를 선별해 음미해 본다.
오늘 일정은 상해 중학교를 답사하고 고속철도 편으로 남경으로 간다고 한다, 상해의 러시아워는 자동차와 자전거가 도로를 메운다. 건널목을 지날 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상해의 교통체증 역시 도시기능에 지장이 되고 있다. “한국고등학교장 중국연수단 일행을 환영합니다”는 전광판이 입구 건물에 보였다. ‘상해시교사교육센터실험기지부속중학교(上海市師資培訓中心實驗基地附屬中學)’란 긴 이름의 상해시 우수 학교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학교 소개를 받고 재학생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학생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합창단과 연주단, 무용단 등 학생들의 특활활동이 우리 교장단의 시선을 끌었다. 이어서 학생들의 창의력을 기르기 위한 실습실에서 여러 가지 교육자재로 우리 교장단이 직접 체험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로봇을 비롯해 인형 놀이 등 학생들의 작품으로는 수준급인 발명품들도 선보였다. 훌륭한 교사가 인재를 육성하고, 교사의 철학이 청소년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입시지옥이 돼버린 우리의 교육정책이 떠오른다. 우리 교장단의 느낌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국 고등학교장 중국연수 기념’이란 한글과 병행한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촬영으로 답사를 마쳤다.

상해 중학교, 칠보노가 옛길을 가다
상해의 옛길인 칠보노가(七寶老街)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상해의 전통 거리에 위치한 ‘칠보노반점’에서 점심을 했다. 푸짐한 상해 전통요리가 코스로 이어진다. 시진평 주석이 취임하면서 “음식을 남기지 말라”는 특별 훈시가 있었다지만 중국은 푸짐한 식단이 기본예절이다. 찾은 손님이 음식을 남겨야 제대로 대접을 했다고 만족해한다는 것이다. “배불러 더는 못 먹겠다”는 즐거운 비명이 들렸지만, 청도 맥주와 상해전통 약주인 ‘황주’를 반주로 곁들여 마셨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취하고 싶은 술맛이다.
상해의 전통 거리를 거닐었다. 칠보노가를 가기 위해 잿빛 운하를 건넜다. 수변에는 회색 건물이 늘어선 가운데 전통 가옥으로 조성된 상점들이 성업 중이다. 유람선들도 운반선 사이로 정박해 있다. 중국의 강물은 대부분 회색이나 황토색이다. 흘러내리는 물보다 고여 있는 물이 많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부유물이 없어 수로는 청결하고 악취가 없다. 칠보노가에는 공예품과 이곳 전통 먹거리가 즐비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시장을 방불케 한다. 돋보기를 써야 볼 수 있을 정도의 깨알 같은 글씨로 조각된 작품들과 장식품들이 눈길을 끈다. 인간 능력의 한계에 도전한 불굴의 의지가 묻어난 걸작들이다. 모두 감탄을 자아낸다. 바퀴벌레 박물관도 보였다. 개인 소장품들이란다. 전통 면직물 공장도 모형으로 보존하면서 수작업으로 만든 의류 판매장도 관광객들의 관심을 끈다. 휴일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북송유존(北宋遺存)이라 새긴 대문을 넘어 돌아보면 아름다운 정자를 마주하고 칠보노가의 패방이 나타난다. 북송은 중국에서 960년경에 조광윤이 카이펑(開封)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로 1127년에 금(金)의 침입을 받아 정강의 변으로 서울을 강남(江南)의 임안(臨安)으로 옮길 때까지를 말한다. 이곳 칠보노가는 북송 시대의 문화가 보존된 지역인가보다. 진귀한 상품들이 진열된 상가들이 많았지만, 일정에 쫓겨 발길을 멈추지 못했다. 아쉬움을 남긴 채 홍교 고속철도역으로 향했다. 남경으로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관광은 그 지역의 문화를 체험하고 그 시대를 느낄 수 있어야 보람이 있을 텐데 ‘수박 겉핥기’ 관광이 되는 기분이다.

일반적으로 넓이를 표현할 때 “운동장만 하다”고 하면 엄청나게 큰 곳을 말한다. 정말 운동장을 몇 개 합친 것보다도 더 넓은 대합실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리는 광경을 본 건 역대합실로서는 난생처음이다. 중국은 우리 남한 면적의 약 100배(960만㎢)로 13억 7,000만 인구가 실감 난다. 이곳 상해만 해도 한국의 절반 정도인 2,300만 명이란다. 산아제한을 하고도 있지만, 상해의 젊은 여성들은 경제적 이유로 아예 출산을 꺼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유아 교육비를 부담하기에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는 가이드는 푸념이다. 거대한 대합실에 수만 명이 운집해있는 광경을 목격해보지 않고는 말로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질서정연하다. 고속철도는 운행 중 최고 시속이 486.1km에 도달하며 남경남역까지는 평균 시속 350km로 달린다고 한다. 일반 열차로 120분 정도 걸리지만, 고속철도는 75분 정도 소요되며, 속도감이나 소음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창밖의 전경에 정신이 팔리면서 피로에 잠깐 잠이 들었던가 보다. 남경남역에 도착해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조선족 가이드(이영학·남 45세)가 북한 억양의 부정확한 발음으로 강소성 소개를 하는 가운데 ‘남경진링장빈’에 도착했다. 이 호텔에서 2박을 하게 된다.
중국 관광에서 강소성(江蘇省)을 제외한다면 의미가 없다. 남쪽의 수려함과 북쪽의 웅장함이 어우러진 가운데 천 년의 역사문화가 살아 숨 쉬는 강소는 산과 바다, 강 등 천혜의 절경을 간직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강남의 어미지향(魚米之鄕)으로 ‘인간의 천당’으로 불리어왔다. 성도인 남경은 6,000년의 고대문화를 간직한 고장으로 2,400여 년의 도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강남에서는 미인이 나오고, 금릉은 제왕을 만든다”고 한다. 남경은 제왕의 도시로 이미 50만 년 전에 고대 인류가 거주했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남경 동쪽에 위치한 탕산에서 원시인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또한, 동오, 동진, 남조의 송, 제, 양, 진 등 육조의 고도였으며 남당, 명, 태평천국, 중화민국 등의 수도가 위치해 ‘십조도성’으로도 불린다. 남경은 유구한 문화유산과 수려한 자연 풍광이 어우러진 경제도시로써 장강삼각주와 화동지구의 경제, 문화, 금융, 무역 중심도시의 하나로 고대 역사문화와 현대문명이 공존하는 강변 생태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면적 6,597㎢에 인구는 8,161만 명이다. 강소성은 전체 면적의 70%가 평야이며. 호수가 20%로 제주도보다 남쪽에 있으며, 영하 4℃~38℃(평균 16℃)의 기온으로 강우량이 풍부하고 2모작이 가능해 어미지향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룸을 배정받아 여장을 풀고 만찬장으로 향했다. ‘한국교류여유설명회’라는 대형 모니터 화면이 설치된 만찬장에는 우리 일행을 비롯해 강소성여유국과 강소성교육청 관계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양국 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여유국 관계자의 강소 관광자원 소개를 마치고 교육청 관계자들이 합석한 가운데 식사와 더불어 환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가이드나 통역자가 없이는 원활한 소통이 되지 못해 안타깝기도 했다. 강ㆍ호수가 많은 지역이라 우리에겐 귀한 민물장어요리가 많이 나왔지만 조리 모양새에 구미(口味)가 당기지 않았다. 호텔 주변의 야경은 인적이나 불빛조차 없어 적막하다. 시내 번화가로 발마사지를 받으러 가는 일행도 있었지만 룸으로 돌아와 샤워로 피로를 풀고 잠자리에 들었다. 즐거워야 할 관광이 피로가 겹쳐 자칫 컨디션을 망칠 수 있다. 해외관광은 건강관리가 우선이라는 것을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것이다.

‘天下精氣’ 중산릉, 명효릉 답사
중국의 호텔 뷔페식 식사는 메뉴가 엇비슷하다. 식사 후 중산릉으로 출발했다. 주차장에는 ‘중산릉원풍경구’라는 금박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산릉원 개찰구를 들어서자 ‘博愛’ 란 큰 패방이 보였다. 중산릉은 손중산(孫中山·孫文) 선생의 능묘로 종산의 제2봉 소모산 남쪽 기슭에 남북향으로 산세를 따라 조성돼 있다. 북쪽의 푸른 절벽을 배경으로 남쪽의 평야를 조망하며 산세에 따라 반원형의 광장과 패방, 묘도, 능문, 비정, 제당, 묘실로 조성돼 있다. 평면도면은 경종모양으로 건립돼 “천하로 하여금 모두 도를 따르게 한다”는 의미로 중산이 일평생 국민을 일깨워 주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그의 애족ㆍ애국정신을 숭배하고 위대한 혁명의 선구자,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중산릉은 1926년에 시공해 1929년 완공, 그 해 6월 1일 유해가 봉안됐으며, 패방에서 능실까지는 수평거리 약 700m로 392개의 계단으로 조성돼 있다. 총면적은 2,000무(133만 3,300㎡)로 첨앙(瞻仰)하는 사람이 위로 올려다보면 울창한 수림과 푸른 기와, 은빛 담장이 어우러져 중산의 호연정기가 천지에 느껴진다고 한다.
수림을 지나자 ‘天下爲公’이란 중산의 친필이 금빛으로 새겨진 거대한 능문이 나타나고 양쪽에 사자상이 지키고 있다. 이 능문은 복건성 화강암으로 건립됐으며, 지붕은 파란색 오지기와로, 3개의 아치형 대문은 동으로 조각됐다고 한다. 대문을 지나자 웅장한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 비각은 둘레 12m, 높이 17m로 화강암과 오지기와로 조성됐으며, 비석은 높이 8.1m, 폭 4m이다. ‘中國國民黨葬 總理孫先生於此'라고 새겨진 금색 비문(碑文)은 국민당 원로인 단연개의 친필이란다.
비각을 지나면 하늘과 맞닿은듯한 웅장한 중산의 제당(祭堂)이 창공에 솟아있다. ‘天地精氣’란 금빛 찬란한 중산의 친필 아래로 民族, 民權, 民生이란 금빛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글은 국민당 원로 장징장(張靜江)의 친필이다. 제당은 중국과 서양의 건축 특색을 결합하여 건립했다고 한다. 제당에 들어서자 중앙에 중산의 백옥 동상이 엄숙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 한백옥(漢白玉) 좌상은 프랑스 조각가 ‘폴로 랑터스키’가 조각했다고 한다. 관리원이 촬영을 제지했지만, 독자를 위해서 몇 컷 찍었다. 제당 양쪽 벽면에는 그의 유작 ‘건국대강’ 전문이 금빛으로 조각돼 있었다. 능실 중앙에는 체코 조각가 ‘코치’가 조각한 중산의 와상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는데 출입이 금지돼 있었다. 동상 뒤편에 ‘浩氣長存’이라고 새긴 석실문이 보였지만 아쉽게도 폐문이다. 중산의 유체가 그곳 지하 적동관(紫銅棺)에 안치돼 있다고 한다. 제당 정상에서 내려다본 중산릉의 거대한 위세는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필자의 안목으로도 천하를 품은 기상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버스에 올랐다. 기록으로나마 전하고 싶은 마음에 촬영에 신경을 쓰다 보면 감상보다는 그림 좋은 장소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다. 사진에 아마추어인 필자가 이럴진대 전문가는 정말 고된 일과일 것이다. 다음 방문지는 명효릉이다.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때가 이동시간이다.
명효릉은 명(明) 왕조의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과 마(馬) 황후의 합장묘로 종산 남쪽 기슭 두룽푸(獨龍阜)에 위치하며, 명 홍무 연간에 건립됐다. 능묘의 둘레는 무려 45리(약 180m)에 달하며, 비정(사방성)ㆍ신도ㆍ비전ㆍ향전(효릉전)ㆍ방성ㆍ명루ㆍ보성 등의 건물이 보존돼 있다. 명효릉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제왕릉으로서 중국 고대 능묘 건축의 전형이 되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있다.
입구에는 대금문이 있었다. 대금문은 명효릉 외각의 정문으로 첫 대문이다. 남향으로 3개의 출입구가 있고 돌로 된 대금문 기초부분과 중간 조각 부분은 명나라 초기 건축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대문 윗부분은 산봉우리 형태의 홑처마이며 황금색 오지기와로 덮였으나 훼손됐다고 하며, 대금문 서쪽은 외곽 성벽과 이어졌는데 아직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신공성덕비루는 명나라 영락 11년(1413년)에 건립됐으며, 건축 평면이 정방형이고 건물 정상이 훼손됐다. ‘사방성’이라고도 불리며 건물 내에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 ‘명성조 주체’가 그의 부친을 위해 세운 ‘대명효릉신공성덕비’가 세워져 있다. 주체의 친필인 비문에는 2,746자로 주원장의 업적이 기록돼 있으며 남경지역에서 가장 큰 고대 비석이다.
대금문을 지나자 신도(神道)가 길게 이어진다. 신도는 직선으로 다양한 동물 석상이 세워져 있는 길이다. 석상로는 효릉신도의 첫 부분으로서 길이가 615m이며 사자를 비롯해 해태, 낙타, 코끼리, 기린, 말 등 6종류의 동물상이 차례대로 세워져 있다. 이 석상들은 큰 바위를 이용하여 원조조각기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조각선이 선명하고 부드러우며, 기백이 웅대하고 품격이 호탕한 것이 특색이다. 이는 황제릉의 숭고함과 성결, 화려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보호와 해악 방지, 예의를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중산릉은 신도를 동물상 대신 나무를 심었다. 시대의 변천 때문일까 아니면 생태환경을 위한 선견지명일까.
신도 오른편에 손권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손권(孫權)은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로서, 가이드의 안내가 아니었으면 지나칠 뻔했다. 묘는 보이지 않고 ‘孫權墓’라는 작은 비석만 세워져 있으며 묘역은 매화농원으로 조성돼 이곳 매실이 지역 특산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주원장은 손권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란 믿음으로 이곳에 묘역을 잡았다고 한다.
신도를 지나자 수목으로 조성된 웅중로(翁仲路)가 나타났다. 이 길은 명효릉 신도의 두 번째 길로 250m의 거리이며, 한 쌍의 맞기둥과 두 쌍의 문관과 무관 석상이 지키고 있다. 기둥 위에는 원주형 암석으로 구름과 용의 모형이 조각돼 있은데, 이는 당·송 시대에 신도 기둥 위에 조각된 연꽃과는 달리 새로운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명효릉은 능묘가 없고 그냥 야산이다. 당시는 적군이나 역적들이 정확한 묘의 위치를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직 발굴하지 않고 있다.
중산릉과 명효릉의 안내판은 모두 중국어와 영어, 일어, 한국어로 표기돼 있다. 한국 관광객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방문도 많은데 맞춤법이 틀린 문장이 많아 안타깝다. 일정 때문에 아쉽게도 명효릉을 모두 돌아보지 못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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