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바다가 오랜 고통을 뚫고 다시 부산에서 화려한 막을 펼친다. 10월 12일부터 21일까지 영화의 전당,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CGV센텀시티, 메가박스 해운대(장산), 동서대학교 소향시어터 등 5개 극장 32개 스크린에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개최된다.
이번 영화제에는 75개국 303편의 작품이 초청돼, 클로드 를르슈 감독, 허우샤오시엔 감독, 지아장커 감독 등 세계적인 거장 감독들의 신작과 함께 나스타샤 킨스키, 틸다 스윈튼, 실비아 창, 탕웨이 등 세계적인 스타들까지 부산을 방문할 예정이어서 어느 해 보다 풍성한 작품과 프로그램으로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최근 몇 년 동안 혼란을 겪었다. 2014년 서병수 부산시장의 ‘다이빙 벨’ 외압 논란으로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사무국에 대한 고소 고발로 이어지면서 영화계 전체가 보이콧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영화계의 대표적인 9개 영화단체들의 보이콧이 이어지자 결국 서병수 시장은 조직위원장직에서 물러나고, 김동호 전 집행위원장을 조직위원장으로 선임하기 위해 부산시장이 당연직 조직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정관을 민간에서 맡을 수 있도록 개정하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올해에는 또 다른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지난 5월 프랑스 칸영화제에 참석 중이던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이 심장마비로 현지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김 부집행위원장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탄생시킨 주역 중 하나이면서 오랜 시간 수석프로그래머를 맡아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영화제로 우뚝 서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영화인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최근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드러나면서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겪었던 이런 어려움들이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탄압이었다는 세간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또한 지난 5월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시작된 국정원 적폐청산 TF에 의해 발견된 문서들에 의하면 이런 탄압이 문화계뿐만 아니라 방송에서도 조직적인 장악시도를 의심케 하고 있다.
이렇게 부산국제영화제의 일련의 사건들이 전 정부차원에서 일어났음이 드러나면서 그간 부산국제영화제와 멀어졌던 영화인들은 다시 부산국제영화제를 살려야한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작년까지 보이콧 입장을 유지했던 한 영화인 단체 관계자는 “정부가 바뀌면서 최소한 이 정권 하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면서 “부산국제영화제가 지켜온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고히 뿌리내리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영화제에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분위기는 영화제 곳곳에서 드러난다. 지난 2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는 공식 후원사를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올해에는 ‘제네시스’가 공식 후원사로 협약을 마쳤다. 제네시스는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 제네시스 세단 풀 라인업인 EQ900, G80, G70 차량 총 80대를 이용해 영화제에 참석하는 스타들의 이동을 돕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은 신수원 감독 연출, 문근영 주연의 ‘유리정원’이다. 뿐만 아니라 올해부터는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에 최신 기술의 상영시스템인 바코(BARCO)사의 플래그십 레이저 프로젝터를 영사기로 도입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명한 영상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 영사기는 세계 최대의 레이저 광원 라인업을 갖춰 최고 화질의 영상을 제공한다.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은 상영 시 희미한 화질 때문에 관객들의 불만이 높았지만 올해부터는 확 바뀐다. 이 영사기는 현재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세계 주요 영화제의 공식 디지털 프로젝터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고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를 기리기 위해 ‘지석상’을 신설한다. 고인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아시아 영화의 성장과 함께 새로운 신임 감독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헌신했다. 이런 고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아시아 영화 발굴과 격려라는 상의 취지를 살려 ‘아시아의 창’ 초청작 가운데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는 10여 편의 후보작품을 선별해 최종적으로 2편을 선정할 예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런 노력은 포스터에서도 묻어난다. 이번 영화제의 공식포스터는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온 한국 추상화의 거장이자 단색화의 대가인 정상화 화백의 작품을 원화로 제작됐다. 영화제 측은 “형식미를 절제하고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철학적인 통찰력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면서 “작품 속 푸른빛의 단조로운 패턴들은 단순하고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같지 않은 다른 색채와 형태의 파편들이 모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로서의 일체감과 깊이가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결국 “거친 파도를 헤치며 지난 시간 동안 꿋꿋하게 성장해 온 부산국제영화제의 세계관을 담은” 포스터라는 설명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22년의 시간 동안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이자 한국 영화계의 자부심이었다. 지난 몇 년간 어려움보다도 영화인들이 끝끝내 놓을 수 없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켜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켜온 이들에게 충분히 박수를 보낼 만하다. 때가 되면 고향으로 회귀하는 물고기처럼 또다시 부산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바다에서 헤엄쳐 볼 일이다.
양명철 기자 ymc@newsone.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