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제일 먼저 찾아가고 싶은 곳이 고향이다. 부모님 산소에 들려 세배도 올리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다. 고향이란 생각만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립고 아련한 추억을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 고향 산천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더욱 옛날이 상기돼 감회가 새로워진다. 현대 도회지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 많다. 고향이 없는 게 아니라 추억을 간직할 고향이 없는 것이다. 급변하는 지역 환경의 변화와 고락을 함께한 친인척이나 동무들이 뿔뿔이 흩어져 고향을 찾지 않는 이가 많다. 이들은 지연(地緣)이라는 특별한 향수를 느끼지 못한다. 도시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은 고향이라는 개념이 나와 다르다. 어릴 적 애환이 서린 시골은 어머니 품속 같은 곳으로 언제나 수구초심(首丘初心)이지만, 아이들은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올해의 고향 방문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동안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됐다(六十而耳順)는 공자의 말씀을 반신반의하며 지냈다. 아직도 부족함이 많아 ‘이순의 도’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순은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과 통하기 때문에 거슬리는 바가 없고, 아는 것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말을 들으면 그 미묘한 점까지 모두 알게 된다”는 등으로 해석하지만,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공통으로 담고 있다.
이제 그렇게 살아보겠다는 약속을 고하기 위한 고향 방문이기에 더욱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동안 아집(我執)을 버리지 못하고 나이를 부정하며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부질없는 욕심이었지만, 생활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귀에 들리는 소리에 감정이 동요되지 않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이순의 도를 알게 될 텐데 수양 부족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새해를 맞아 ‘육십이이순’을 가슴에 새기며 들리는 소리를 순화해서 수용하려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살다 보면 알 거야. 아마 알 거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갑자기 승용차 내 음악이 크게 들린다. 오늘따라 대중 가수의 노래가 왜 이렇게 애잔하게 들리는 걸까. 머잖아 고객을 아버님이라던 호칭이 어르신으로 바뀔 것이다. 서글픈 생각이 밀려오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앞으로 어른으로서 귀감이 되도록 노력하고, 내 할 일을 하면서 이순의 도를 곱씹으며 살아갈 것이다. 어르신으로 대우를 받으려면 세상사를 깨우치고 그야말로 ‘六十而耳順’의 경지에 도달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지금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계층 간 갈등을 부추기며,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늙은이들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려 나이를 부끄럽게 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소위 ‘추하게 늙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 그 삶이 후배들의 모범이 될 수 있을 때이다. 인생의 흔적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 이치를 빨리 깨달아야 하는데 뭔 욕심을 그렇게 내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고령 사회가 될수록 아름다운 노인이 많은 세상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사회보장제도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마음가짐과 노력이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늙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만큼 추한 것이 없다.
동네 어귀를 들어서자 허리 굽은 어르신이 부지런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동승을 권유했지만, 운동 삼아 걸어가시겠단다. 나의 미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노인으로 취급될까 봐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노인은 혈기가 넘치며 꿈을 가지고 있다. 무기력하고 거추장스러운 늙은이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힘겨운 걸음걸이지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걸어갈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읽힌다.
정유년 새해부터는 ‘六十而耳順’의 경지에 들기 위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베풀고 사는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일 것이다.
전병열 편집인 chairman@newsone.co.kr
|
|